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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

by 무님 2020.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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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은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둘째 아들인 왕자이다. 이름은 이보(), 초명은 이호(). 자는 선숙(), 호는 연강().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 )이다. 1407년(태종 7) 효령군()에 봉해지고, 1412년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효령대군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이며 6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해 태종을 따라 항상 사냥터에 다녔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형인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자 자신이 세자로 책봉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자 불교에 심취하였다. 충녕과는 우애가 깊었고 세종이 자기 집에 들르게 되면 밤이 깊도록 국사에 대해 의논했다고 전한다. 특히, 불교에 독실하여 수많은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론하도록 했다.

 

1429년(세종 11) 관악사()를 삼창()하고, 약사여래상(), 미륵존상() 및 삼층석탑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월출산 무위사()의 중창을 지유()하고, 만덕산 백련사() 중창의 시주()가 되었다.

1430년(세종 12)에 왕명을 받아 어용()과 『선원록()』을 새로 조성한 선원전(殿)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그 해 윤12월에 문소전(殿)의 친제()에 종헌관()으로 참례하였다. 또한 1432년 한강에서 7일간 수륙재()를 개최하였다.

1434년 1월에는 친형 양녕대군()과 함께 계달문서()에 이름을 쓰지 않도록 조처하였다. 그 해 4월 회암사()의 중수를 건의하고, 1435년 회암사에서 불사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5월에는 흥천사탑전(殿)의 수리를 관장하였다.

1438년경에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를 사경()해 천안 광덕사()에 시주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용문산 상원사()에 종을 주조해 봉안하였다. 그리고 1454년에는 1447년에 조성한 태안사() 대발()을 개조하였다.

1458년(세조 4)에는 태조가 1398년(태조 7)에 지은 함흥 선향헌목()의 서문을 지었다. 그리고 1469년에 함흥에 가서 향헌법 56조를 만들어 시행토록 하였다. 그런 한편 1460년 4월에는 왕세자빈의 책봉사가 되었다. 1464년 5월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개최했으며, 그 해 5월부터 이듬 해 4월까지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동하였다.

1463년『법화경』, 1464년『선종영가집()』과 『금강경』, 1465년『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고, 『원각경』을 수교()하였다. 1482년(성종 13)에는 강진 만덕사()에 영세불절()의 수류개를 위한 전답 10결()을 시주하였다.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이 많았지만, 불교의 보호와 진흥에 공헌한 바 크다.

 

효령대군과 예성부주인의 묘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는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2남 효령대군 이보의 사당. 묘가 있다.

 

1736년(영조 12) 묘하()에 청권사()가 건립되었다. 1

청권사는 1736년(영조 12) 효령대군의 내외손이 사당 건립에 대한 소청장을 올리자 왕명으로 경기감영에서 짓도록 하였다. 이듬해 완성되어 청권사라 이름하였다. 청권이란 이름은 『논어』 권18 「미자편()」에서 연유된 것으로 “신중청폐중권()”의 약어이다.

즉 고대 중국에 있어서 은나라가 쇠하고 주나라가 신흥할 때의 일이다. 주나라의 대왕은 아들이 셋 있는데, 장자는 태백(), 차자는 우중(, ), 셋째는 계력()이었다. 계력이 아들 창()을 낳으니 성덕이 있었다.

대왕이 은나라를 치려 했으나 태백이 따르지 않자 대왕이 마침내 왕위를 계력에게 전해 창에게 미치고자 하였다. 이에 태백이 이를 알고 곧 동생 우중과 같이 형만()의 땅으로 도망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하여 대왕이 계력을 세우고 나라를 전해 창에 이르러 3분된 천하의 둘을 얻으니 이가 문왕()이다. 문왕에 이어 아들 발()이 왕위를 계승해 은나라를 이기고 천하를 얻으니 이가 무왕()이다. 이렇듯 주왕실이 천하를 얻은 공은 태백과 우중 형제의 양보에 근원하였다.

특히 우중은 오나라에 살면서 머리를 깎고 몸에 문신해 옷을 벗어 장식하였다. 그리고 숨어살면서 홀로 착했으니 도의 맑음에 합한 것이요, 방언해 스스로 폐한 것이니 도의 권도에 합한 것이었다. 즉 대왕의 차자인 우중의 처신이 청도()에 맞았고, 스스로 폐한 것이 권도()에 맞았다는 ‘신중청폐권도’의 고사를 효령대군에 비유한 것이다.

 

789년(정조 13) 사액()되었다. 그리고 1865년(고종 2) 양녕대군과 함께 세종묘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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