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정암 - 조선시대 병조참판, 전주부윤,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 서울 출신. 감정(監正) 이거(李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이달존(李達尊)이다. 아버지는 사직서영(社稷署令) 이탕(李宕)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김응진(金應辰)의 딸이다. 이조참판 이정형(李廷馨)의 형이다.
1558년 (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61년(명종 1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를 역임하고 예문관검열로 사관을 겸하였다. 1565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년) 성균관전적·공조좌랑·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듬해 외직인 전라도도사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올렸고, 이어 중앙으로 돌아와 형조좌랑을 거쳐 다시 함경도도사로 나갔다. 1569년 경기도도사로 옮겼다가 경직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고, 이듬해 형조좌랑에 재임용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병조정랑으로 옮겨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재해 지역을 살피고 돌아와 정언을 역임하였다.
1571년 예조정랑·사헌부지평으로 춘추관의 직책을 겸임하고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경기도경차관(京畿道敬差官)으로 재해 지역을 살피고 돌아왔다. 1572년 성균관사예에 임명되어 춘당대 친시(春塘臺親試)에 참시관(參試官)으로 입시하였다.
그 해 여름 연안부사가 되어 군적(軍籍)을 다시 정리했으며,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576년 장단부사를 거쳐 1578년 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양주목사로 나가 도봉서원(道峰書院)과 향교를 중수하고, 전안(田案)을 개혁, 대동법을 실시해 번잡한 역(役)을 없애는 등 크게 치적을 쌓았다. 1580년 평산부사를 거쳐 1584년 장령·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587년 동래부사가 되어 내왕하는 일본인들의 폐단을 근절시켰다. 1591년 첨지중추부사·장례원판결사·승지·공조참의·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이조참의로 있었는데,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하자 뒤늦게 호종(扈從)했으나 이미 체직되어 소임이 없었다. 아우인 개성유수 이정형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려 했으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황해도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해 연안성(延安城)을 지킬 것을 결심하고 준비 작업을 서두르던 중 도내에 주둔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5,000∼6,000명의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자, 주야 4일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해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3년 병조참판·전주부윤·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96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했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고, 황해도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난이 끝나자 풍덕에 은퇴해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
1604년 연안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혼(成渾)·이제신(李濟臣) 등과 교유하였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상례초(喪禮抄)』·『독역고(讀易攷)』·『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사류재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2. 이정형 - 조선시대 우승지, 장례원판결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
헌납(獻納) 이거(李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이달존(李達尊)이고, 아버지는 사직서영(社稷署令) 이탕(李宕)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응진(金應辰)의 딸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정암(李廷암)의 아우이다. 정윤희(丁允禧)의 문인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 해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이 되었다. 1570년(선조 3) 형조좌랑·전적, 이듬해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형조정랑, 1574년 사간원정언·경성판관, 이듬 해 사간원헌납·예조정랑을 거쳐 1576년 개성부경력이 되었는데, 전곡(錢穀)·사송(詞訟)의 처리를 잘해 부민(府民)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78년 하지사서장관(賀至使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함경도순무어사·광주목사(廣州牧使)·홍문관부수찬·의정부검상·승정원좌부승지·대사성을 거쳐 1589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다.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병을 모아 성거산(聖居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했으며, 장단·삭녕 등지에서도 의병을 모집해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3년 장례원판결사가 되고 다음해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와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승문원부제조·비변사당상을 역임하고, 1595년 대사헌에 이어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었다. 160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북인이 정권을 잡고 정계가 어지럽자 양주 송산 두천리(松山杜川里)로 물러나 대사성·호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어도 나가지 않았다. 1606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다음 해 임지에서 죽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성력(星曆)·복서(卜筮)·술수(術數)에도 통달했다 한다. 이원익(李元翼)·이호민(李好民)·이수광(李睟光) 등과 가깝게 지냈다. 1617년(광해군 9)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동각잡기』·『황토기사』·『용사기사(龍蛇記事)』·『수춘잡기(壽春雜記)』·『지퇴당집』 등이 있다.
3. 이종인 - 조선전기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이극감(李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수학하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해 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지방에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 불러서 타이름)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를 올려 이이·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조선 인물 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조 시대 관련 인물 (0) | 2021.01.04 |
---|---|
선조시대 관련 인물 (0) | 2020.12.24 |
선조 시대 관련 인물 (0) | 2020.12.23 |
선조 시대 관련 인물 (0) | 2020.12.22 |
선조 시대 관련 인물 (0) | 2020.12.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