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준경 - 조선전기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이극감(李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수학하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해 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지방에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 불러서 타이름)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를 올려 이이·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2. 임중량 - 생몰년 미상의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무용에 뛰어나 역사(力士)로 유명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사(壯士) 윤붕(尹鵬)·윤린(尹麟)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어 평안도지방에 들어온 왜군을 방어하였으나 패하고, 안주·정주로 철수하여 관군과 의병을 규합하여 적과 싸웠다.
이듬해 안주목사 겸 안주방어사로 발탁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평양탈환전에 참가하였고, 1594년윤근수(尹根壽)의 천거로 천총(千摠)이 되었다. 난이 끝나자 향리로 은퇴하여 여생을 보냈다. 고을 백성들이 해마다 한식 때 제사를 지내주었다.
3. 정개청 - 조선전기 북부참봉, 전생서주부, 곡성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 나주 출신. 아버지는 봉산훈도 정세웅(鄭世雄)이며, 어머니는 나씨(羅氏)이다. 유년시에 보성군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10여 년간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 등의 잡학을 강구하였다. 그 뒤 산에서 나와, 서울에서 박순(朴淳) 등과 종유하며 학문을 강구한 뒤, 만년에 전라도 무안의 엄담(淹潭)에 이주해 윤암(輪巖)에 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예학(禮學)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1574년(선조 7) 전라감사 박민헌(朴民獻), 1583년 영의정 박순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지만, 수차의 관직 제수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에 그의 관직생활은 46세에 북부참봉을 지낸 이후 55세에 나주훈도, 58세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그리고 60세 되던 해 이산해(李山海)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지내는 데 그쳤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 때 이의 처리과정상 연루자의 색출이 지방 사류에게까지 확대되는 와중에서, 1590년 5월 정여립과 동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같은 해 6월 함경도 경원 아산보(阿山堡)로 이배되고, 7월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가문이나 관직생활은 평범해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기축옥사에 피화된 뒤 그의 제자들이 신원운동을 치열히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616년(광해군 8) 그를 봉사하는 자산서원(紫山書院)이 엄담에 건립된 뒤 1694년(숙종 20)까지 집권세력의 당색에 따라 몇 차례 치폐(置廢)를 반복, 서원과 당쟁의 연계라는 드문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산서원의 치폐는 남인의 집권시에 건립, 복설되고, 서인의 집권시에는 훼철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그에 대한 포폄도 기복을 겪는다. 또한, 호남지방의 사류들이 다수 이 분쟁에 관련되어 조선 후기 정치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한 하나의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스승으로는 서경덕(徐敬德)과 박순의 이름이 거론되나 전후사정을 검토해볼 때 박순을 종유했다는 설이 타당해 보인다. 문생들이 400여 명에 달했다 하는데, 그 중 저명한 자로는 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나덕현(羅德顯)·나덕원(羅德元)·안중묵(安重默)·최홍우(崔弘宇)·정식(鄭湜)·유양(柳瀁)·윤제(尹濟)·정지함(鄭之諴) 등 당시 호남지방의 유력 가문 출신이 다수 포함되었음이 주목된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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