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선조실록

by 무님 2020. 4. 24.
728x90

<선조실록>은 선조 재위기간인 1567년 7월에서 1608년 1월인 41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선조소경대왕실록>이며, 모두 221권 116책으로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선조의 묘호는 처음에 선종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선조실록>의 판심에는 <선조대왕실록>이라 인각되어 있다.

광해군 8년인 1616년 8월에 묘호를 선조로 고치면ㄴ서 실록의 표제도 <선조소경대왕실록>이라 하였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원년 1609년 7월 12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8년 1616년 11월에 완성하였다. <선조실록>은 그 대부분이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 뒤 16년간의 기사로 되어 있으며, 전체 221권 중 195권에 달한다. 반면 선조 즉위년인 1567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약 25년간의 가사는 모두 26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등의 공공 기록과 사초들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실록 편찬의 자료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선조실록>이 광해군 때  대북 정권의 주도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서인과 남인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많았다. 이 때움에 인조반정 뒤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 관원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과영춘추관사-기자헌, 감춘추관사-이항복, 도청당상지추춘관사-이호민,유근, 이이첨,이정귀,박홍구,조정,민몽룡,정창연,이상의,윤방 등이다.

묘호는 처음에 선종으로 정하였으나 광해군 8년인 1616년 8월에 선조로 개정하였다. 시호는 소경, 존호는 정륜입국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 능호는 목릉이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경내에 있다.

 

 

<선조실록>의 내용

선조의 이름의 연, 초명은 균으로 중종의 일곱째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이다. 처음에는 하성군에 봉해졌다.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가 1563년에 세상을 떠나자 후사가 없었으므로 1567년 7월 3일 임종 때 유명을 내려 하성군을 후계자로 즉위케 하였다. 선조 23년인 1590년에는 왜국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조 25년인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는 한편,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원벼을 청하였다. 이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를 설치항 의병과 군량미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전국에 의병이 봉기하여 왜적의 후방을 위협하였고 관군도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수군이 한산도 대첩으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진출을 막는 제 크게 공헌하였다. 명나라의 원병과 관군이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선조 26년인 1593년 10월에 서울로 환도하여 질서를 정비하고 전국을 수습하였다. 1575년 선조8년 심의겸과 김효원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동.서인으로 나위게 되고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인한 기축옥사의 처리 문제로 1589년 선조22 동인은 다시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선조는 재위 41년 되던 해인 1608년 2월 1일 별궁인 경운궁에서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선조의 태실 이야기

 

 

제 14대 임금인 선조(1567~1608)의 태를 묻는 태실은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237번지에 있다.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117호.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앞면에는 '선조대왕태실'이라고 새겨 모셔 놓은 태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뒷면에는 비를 세운 시기를 적어 놓았다

 

 

 

 

태실비는 원래 강원도 춘천과 황해도 강음으로 정했었지만, 부여로 최종 결정되었다. 1570년(선조 3년) 안태사 송린수가 이곳에 선조의 태함을 안치하고, 비를 세웠다. 선조 3년(1570)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글자가 지워지자, 1747년(영조 23년)에 다시 세웠다. 비에는 '선조대왕태실'이라고 적혀 있다. 선조의 태실비는 가봉비만 2기가 남아있다. 처음 만든 가봉비는 귀부가 없이 태봉산 기슭에 세워져 있다. 2차 가봉비는 오덕사 대웅전 부근에 옮겨져 있다. 선조는 부친이 덕흥대원군 이기 때문에 아기 태실은 조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외형은 그리 세련되지 못했고, 귀부는 다소 희화적인 모습으로 느껴진다. 태항아리는 특이하다. 전체적인 형상에 비해 주둥이가 작고, 어깨까지 급하게 벌어지다가 아래로 가면서 좁아진다. 2층 굽이며, 어깨에 4개의 고리가 달려있다. 제작 시기는 1570년이다.

 

 

 

 

가봉비의 명문을 살펴보면,

가봉비 1은 (前面 : 主上殿下胎室, 後面 : 隆慶四年十月二十一日立)

(전면 :주상전하태실, 후면 : 융경사년십월이십일일립)

가봉비 2는 (前面 : 主上殿下胎室, 後面 : 崇禎紀元後一百二十年丁卯五月初三日立 / 隆慶四年庚午十月二十一日所立碑字歲久刻缺故改石)

(전면 :주상전하태실, 후면 :숭정기원후일백이십년정묘오월초삼일립/융경사년경오십월이십일일소립비자세구각결고개석)

이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