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13 일생을 당쟁으로 살던 < 고산 윤선도 >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이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윤선도는 서울 출생.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惟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惟幾)의 양자이다. 8세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살았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 성균관 유생에게 시행하던 시험)에 1등을 했으며 향시(鄕試)와 진사시(進士.. 2020. 6. 26. 조선 17대 왕 효종 - 이호 조선 제17대 왕(재위 1649∼1659).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다. 효종의 휘(諱) 호(淏). 자 정연(靜淵). 호 죽오(竹梧). 시호 명의(明義). 인조(仁祖)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 청주 한씨이며, 부인은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이다. 효종은 13세에 한 살 위인 인선왕후와 혼인하여 1남 6녀를, 후궁인 안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다. 효종은 인.. 2020. 6. 10. 삼전도의굴욕 - 인조의 굴욕과 나라의 슬픔 조선은 청의 주장대로 군신 관계를 수립하고, 두 왕자와 강경한 척화론자들(홍익한, 윤집, 오달제 - 삼학사)가 인질로 잡혀가게 되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호란의 영향으로는 청의 침입로였던 서북 지방이 황폐화되었고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 우월감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1) 최명길의 주화론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들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늘 생각해 보아도 우리의 국력은 현재 바닥나 있고 오랑캐의 병력은 강성합니다. 정묘년(.. 2020. 6. 4. 김자점, 인조반정의 공신? 나라의 역적!! 김자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이귀 등과 인조반정을 성공시켰으며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 사림세력의 등용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이후 유배되었다가 아들 김익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되었다. 본관 안동. 자 성지(成之). 호 낙서(洛西). 성혼(成渾)의 문인.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동지를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해바친 김질(金礩)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억령이다. 음보로 출사해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 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2020. 6. 3. 인조시대 백마산성 임경업 임경업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청북방어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백성의 신망을 받았고 명, 청군에도 명성이 높았다. 명나라에 망명하여 청나라와 싸우다 생포되었으며,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압송되어 형틀에서 장살되었다. 임경업은 1594년 충주(忠州) 달천(達川)에 출생하였고 부친은 임황(林篁)이다.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자 영백(英伯). 호 고송(孤松). 시호 충민(忠愍)이다.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24세 때인 1618년(광해군 10) 동생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후금이 건국되면서(1616년) 왕조 교체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임경업이 급제한.. 2020. 5. 31. 인조시대 인물 - 남한산성 최명길 최명길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부친은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 모친은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 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으며, 신흠(申欽)의 문인이기도 하다. 최명길은 1586년(선조 19) 금천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오늘은 증자(曾子)가 되고 내일은 안자(晏子)가 되며, 또 그 다음 날엔 공자(孔子)가 되리라."라고 맹세해 부모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 2020. 5. 29. 병자호란 - 광교산 전투를 말하다 - 광교산 전투는 병자호란 때인 1637년 1월 29일 부터 1월 31일까지 경기도 용인의 광교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라병사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청나라 장수 양굴리[楊古利]가 이끄는 청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청나라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는 관서(關西) 지방의 요충지인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ㆍ안주성(安州城)ㆍ황주 정방산성(正方山城) 등에 집결해 있는 조선군을 우회하여 한양을 향해 빠르게 남하했다. 1637년 1월 8일 무렵에는 마부타[馬福塔]가 이끈 청나라의 돌격대가 이미 개성 부근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홍타이지가 직접 이끈 본대도 청천강을 건너 안주(安州)에 이르러 있었다. 청나라 군대의 빠른 남하에 놀란 인조(仁祖)는 1월 9일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 2020. 5. 26. 인조의 며느리, 소현세자의 비 민회빈 강씨 민회빈 강씨는 본관 금천(衿川).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가례(嘉禮)를 올려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병자호란 뒤인 1637년 세자와 함께 인질로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1645년 귀국하였다. 1627년,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는 강석기의 딸을 최종 세자빈으로 간택하여 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사실 강씨는 본래 세자빈이 되지 못했을수도 있었다. 그녀가 간택되기 2년 전, 소현세자는 파평 윤씨 가문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 규수는 이괄의 난에 가담한 윤인발과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결국 파혼당해 내쳐지게 되었다. 이후 소현세자의 혼례가 무산된 지 2년 만에 다시 간택을 거쳐 뽑힌 여인이 강빈이다. 이후 병자호란의 패배와 정축하.. 2020. 5. 24.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병자호란의 배경은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2020. 5. 23.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