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부친은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 모친은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 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으며, 신흠(申欽)의 문인이기도 하다.
최명길은 1586년(선조 19) 금천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오늘은 증자(曾子)가 되고 내일은 안자(晏子)가 되며, 또 그 다음 날엔 공자(孔子)가 되리라."라고 맹세해 부모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배웠고, 조익(趙翼)·장유(張維)·이시백(李時白)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국내 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 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 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때문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또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 인조의 생부, 뒤에 元宗으로 추존) 합부(合祔: 신주를 한 사당에 모셔 놓고 한 곳에서 제사지냄)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부제학·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절화(絶和: 화의를 단절함)의 의논이 높아졌는데 그는 당장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여 몇 년 간은 무사할 수 있으나 종막(終幕)은 심히 우려된다고 하면서 원망을 불러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1635년 초 이조판서직을 면하고 몇 달 뒤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정묘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년) 중원을 장악한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조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청과의 일전에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최명길은 인조가 강화도로 하루빨리 옮겨가기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 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이제 조선 정부는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청과 강화를 맺어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최명길이 강화를 청하는 국서(國書)를 지은 날이 1637년 1월 18일이었다. 척화파인 김상헌이 그 글을 찢고 대성통곡하여 울음 소리가 임금의 거처까지 들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김상헌은 최명길을 향해 “그대의 아버지는 자못 명성이 사우(士友) 간에 자자하였는데, 공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라며 꾸짖었다. 최명길은 “어찌 대감을 옳지 않다 하겠소. 그러나 이는 곧 부득이한 것입니다.” 하고, 빙그레 웃으며 “대감은 찢었으나 나는 이것을 주워 붙여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청(淸)에 보내는 답서를 다시 주워 모았다.
강화를 향한 최명길의 의지는 단호했다. 당시 항복 문서를 작성하는 최명길을 만난 김류는 “내 뜻은 그대와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선비들의 공론은 어찌하겠는가?”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들이 비록 만고의 죄인이 될지라도 차마 임금을 반드시 망할 땅에 둘 수는 없으니, 오늘의 화친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 답했다.
최명길의 강화론은 간단했다. 청군에 대항해 봐야 힘이 미치지 않는데, 만약 싸우게 되면 나라가 절단난다는 것이다. 비록 비굴한 모양새를 취하더라도 나라만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후금의 사신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외침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싸우자는 소리만 외칠 뿐이었지 실제로는 아무런 방책도 없이 우왕좌왕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백성들의 시체가 산처럼 높아져만 갔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강화가 성립되어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는 수모를 겪었다.
강화가 이루어 진 뒤 최명길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이 청과 강화를 한 것은 종묘 사직을 위하여 보존하기를 도모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의 자문(咨文- 외교문서)을 보내고자 했다. 요동을 지키는 청의 눈길을 피해 바닷길로 은밀하게 보내야했다. 1638년 가을에 강가에서 경비하던 군사가 독보(獨步)라는 이름의 중을 데리고 왔는데 최명길은 이 사람에게 명나라에 자문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자문은 마침내 명나라 황제에까지 전달 되었다.
최명길은 1642년(인조 20)에 명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청국에 소환되었다. 최명길은 용골대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왕은 모르는 일이고 자기가 전적으로 한 일이라 했다. 이윽고 수갑과 쇠사슬이 채워진 상태로 심양 북관(北館)에 갇혔는데 북관은 사형수를 가두어두는 감방이었다.
이듬해 4월 최명길은 북관에서 남관으로 이관되었는데, 당시 남관에는 김상헌이 수감되어 있었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표가 나라를 위하다가 청나라의 감옥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명예를 위하는 자라 판단하고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하였는데, 같이 구금된 상황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탄복하였다
마침내 최명길은 1645년(인조 23) 3월에 풀려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60세. 이제 병들고 늙은 몸만 남아 있는 노인이었다. 귀국한 지 2년 후 병으로 누운 뒤 인조가 직접 문병을 갔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5월 17일 62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陽明學)을 독수(獨修: 혼자서 은밀히 공부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 장유나, 계자(系子) 후량(後亮) 및 손자 석정(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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