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 전투는 병자호란 때인 1637년 1월 29일 부터 1월 31일까지 경기도 용인의 광교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라병사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청나라 장수 양굴리[楊古利]가 이끄는 청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청나라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는 관서(關西) 지방의 요충지인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ㆍ안주성(安州城)ㆍ황주 정방산성(正方山城) 등에 집결해 있는 조선군을 우회하여 한양을 향해 빠르게 남하했다. 1637년 1월 8일 무렵에는 마부타[馬福塔]가 이끈 청나라의 돌격대가 이미 개성 부근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홍타이지가 직접 이끈 본대도 청천강을 건너 안주(安州)에 이르러 있었다.
청나라 군대의 빠른 남하에 놀란 인조(仁祖)는 1월 9일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다. 하지만 마부타의 돌격대가 이미 도성 밖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로를 남한산성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에 최명길(崔鳴吉)을 사신으로 보내 강화를 요청했으나 결렬되자,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근왕군(勤王軍)을 이끌고 상경해 남한산성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1637년 1월 15일 광주(光州)에서 인조의 명령을 전달받은 전라도 관찰사 이시방(李時昉)은 서둘러 각 군영(軍營)에 연락을 보내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인 여산(礪山)으로 병력을 집결시키도록 지시했다. 전라도 병마사 김준룡(金俊龍)도 곧바로 병력을 모아 여산으로 향했다.
1월 19일 여산에 전라도의 근왕군이 집결하자, 김준룡은 먼저 2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주(公州)로 출발했다. 이시방도 후속 부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김준룡이 이끄는 전라도 근왕군은 1월 21일 지금의 경기도 안성인 죽산(竹山)에 도착했으며, 이시방이 이끄는 병력은 천안(天安)에 이르렀다.
1월 29일 병마사 김준룡이 이끄는 전라도 근왕군은 남한산성에서 남쪽으로 4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용인의 광교산(光敎山)에 도착했다. 후속 부대를 이끌던 관찰사 이시방은 승병(僧兵) 등과 합류해서 안성의 성남사(城南寺)에 머무르고 있었다.
광교산에 도착한 김준룡은 진영을 설치하고 날래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을 뽑아 사방에 배치했다. 진영 바깥에는 방패를 줄지어 세워 청나라 기병의 공격에 대비했으며, 척후를 보내 청나라 군대의 동향을 탐지했다. 전라도 근왕군은 밤마다 횃불을 들고 포를 쏘고 고함을 쳐서 남한산성과 연락을 시도했으며, 1월 30일에는 청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직접 남한산성 안으로 장계(狀啓)를 전하기도 했다.
당시 용인 지역에는 청나라 태조(太祖)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사위인 양굴리[揚古利]가 이끄는 부대가 남쪽에서 올라오는 근왕군을 막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다. 전라도 근왕군이 광교산에 진영을 설치하고 남한산성과의 연결을 꾀하자 양굴리는 병력을 보내 공격해왔다. 여러 차례 접전이 벌어졌으나 청나라 군대는 수많은 사상자만 낳은 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양굴리는 1월 31일 직접 5천 명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광교산을 공격해왔다. 청나라 군대는 호준포(虎蹲砲)를 연달아 발사하고 화살과 돌을 비 오듯이 쏘아댔으나 조선군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오후에 청나라 군대가 광교산 북쪽으로부터 조선군의 후방을 기습해와서 광양현감(光陽縣監) 최택(崔澤)의 부대가 지키던 방어선이 돌파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김준룡은 유격군(遊擊軍)을 보내 청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해질 무렵까지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전투 도중에 양굴리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장수 2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자 청나라 군대는 공격을 중단하고 물러났다. 총탄에 맞은 양굴리는 한양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죽었다
광교산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는 반수 이상의 병력을 잃고, 광교산 동방 10리 지점까지 퇴각하였다.
병자호란 기간 중에 얻은 최대의 전과로, 청나라 군대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살된 청나라 장수 양굴리는 청나라 태종의 매부이며, 청국 제일의 명장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의 군대는 1월 6일 밤, 탄약과 군량이 고갈된 상태에서 청군과 교전을 계속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수원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 호준보란?병
명나라 장군 척계광(戚繼光)이 발명한 대포이다. 앞부분의 다리 두개에 포신이 끼어 있는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호준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명나라에서 왜구와 싸울 때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작고 가벼우면서도 사정거리가 긴 화기(火器)를 개발한 것이 호준포이다. 1회의 포격으로 조총용 탄환 100발 분량을 발사할 수 있었고 사정거리가 2km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명나라 군대의 중요한 무기로 기동력을 중요시하는 기병 부대에도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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