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청북방어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백성의 신망을 받았고 명, 청군에도 명성이 높았다. 명나라에 망명하여 청나라와 싸우다 생포되었으며,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압송되어 형틀에서 장살되었다.
임경업은 1594년 충주(忠州) 달천(達川)에 출생하였고 부친은 임황(林篁)이다.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자 영백(英伯). 호 고송(孤松). 시호 충민(忠愍)이다.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24세 때인 1618년(광해군 10) 동생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후금이 건국되면서(1616년) 왕조 교체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임경업이 급제한 해에 명을 처음으로 공격했다.
임경업은 함경도에서 군직을 시작했다. 갑산(甲山)에서 2년 동안 근무한 뒤 같은 함경도의 삼수 소농보(小農堡) 권관(權管, 종9품)으로 옮겼다. 거기서 군량과 군기를 잘 구비한 공로로 절충장군(折衝將軍, 무반 정3품 당상관)에 임명되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그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서도 전공을 세워 진무원종(振武原從) 1등공신에 책봉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에 올랐다. 30세의 나이에 이룬 빠르고 순조로운 관운이었다.
이듬해부터는 근무지가 전라도로 바뀌었다. 임경업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겸 우림위장(羽林衛將, 종2품)을 거쳐 방답첨사(防踏僉使, 종3품. 방답은 현재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에 임명되었고, 1년 뒤에는 전라도 낙안(樂安)군수로 부임했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임경업은 33세의 혈기 넘치는 나이였다. 낙안군수였던 그는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참전했지만, 두 달 만에 강화가 성립되는 바람에 다시 내려왔다.
그 뒤 임경업은 평안도에 배속되었다. 청의 주요한 공격로를 막을 수 있는 뛰어난 장수를 배치한 결과였다. 그는 1629년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까지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종4품), 평양 중군(中軍, 종2품), 검산산성(劒山山城, 현재 평안도 선천) 방어사(防禦使, 종2품), 정주(定州)목사, 청북(淸北, 청천강 이북) 방어사, 안변부사, 의주부윤, 의주진 병마첨절제사 등을 겸직하거나 거쳤다. 그가 주둔한 거점은 최북방의 백마산성(白馬山城, 평안북도 의주 소재)이었다.
이때 임경업은 명에까지 이름을 알리는 전공을 세웠다. 1633년 4월 공유덕(孔有德)ㆍ경중명(耿仲明) 등이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내통하려고 하자 명의 장수 주문욱(朱文郁)과 협공해 섬멸한 것이었다. 이 공로로 임경업은 명에서 총병(摠兵)에 임명되었고, 그 뒤 ‘임총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임경업은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경제적ㆍ군사적 상황을 개선시켰다. 조정의 재정 지원을 받아 중국과 무역해 자금을 축적하고 유민(流民)을 모아 둔전(屯田: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을 개설해 상주 인구를 늘렸다.
그러나 조정은 현실보다 명분에 집착했고,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1636년 12월 청군은 재침했고, 보름 여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런 빠른 승전의 요인은 조선이 설치한 주요 방어 거점을 그대로 통과해 수도를 직격(直擊)하는 전략이었다. 당연히 청군은 첫 걸림돌인 임경업의 백마산성을 그대로 지나쳤다. 임경업과 그의 정예병은 조국의 항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백마산성은 북한 평안북도 의주군에 있는 고려전기 이후 내성과 조선후기의 외성으로 구성된 석축 성곽 산성이다.
흰 용마가 놀던 곳이라고 전하는 백마산 고지는 북으로는 의주, 남으로는 용천과 피현 일대의 사방을 굽어볼 수 있어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북으로는 압록강을 건너 랴오둥[遼東]지방과 통하고 남으로는 선천군·정주군·안주군·구성군을 거쳐 평양시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백마산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 때 백마산 주봉인 북장대에서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두 개의 골짜기를 돌로 막아 쌓고는 우마성이라 하였는데, 이 우마성을 기초로 하여 내성과 외성이 축조되었다.
내성은 둘레 2,6km로, 우마성을 기초로 하여 고려시대인 1014 ~17년에 강감찬의 지휘로 다시 쌓았다. 성벽은 대부분 우마성 자리에 다시 쌓은 것으로 북장대에서 동쪽과 남쪽의 산등성이에 벽을 쌓고 두 성벽의 동쪽과 남쪽 끝을 잇대어 남쪽 벽을 쌓았다. 그 남쪽에는 외성의 성벽을 이어서 쌓았다.
외성은 둘레 2,4km로, 1735년(조선 영조 11)에 내성 밖 남쪽에 덧대어 쌓았다. 성벽 안에 막돌과 흙을 채워 넣었으며 높이는 5~7m이다. 성벽에는 각루와 치를 설치하였던 자리가 남아 있다.
내성과 외성의 네 문에는 무지개문을 냈던 자리가 남아 있으며, 특히 외성 남문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문루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
성 안에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장대들이 설치되었다. 13개의 못과 32개의 우물터가 있으며 여러 채의 무기고와 식량창고, 집터 등도 있다. 1018년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을 때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633년에는 임경업이 이 성에 웅거하면서 성을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여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우리나라 중세의 성곽 건축과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성이다. 하나의 성이지만 부분별로 쌓은 시기가 달라 각 시기의 축성 형식과 방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임경업은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일전을 기다렸으나 싸워보지 못했다.
결국 남한산성(南漢山城)까지 포위되어 조선은 항복을 선언하였다. 임경업은 압록강에서 철군하는 청나라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의 기병 약 300기를 섬멸하고 포로로 끌려가던 양민 100여 명을 구출하였다. 그 후 청나라가 명나라 군대를 치기 위해 병력을 요청하자 수군장(水軍將)에 임명되어 참전했으나 명나라와 내통하여 피해를 줄이게 했으며 철저한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 무장(武將)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청북지역과 주둔지의 재건을 위해 청나라 심양과 교역을 하자 또다시 탄핵되어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청나라는 명을 치기위해 조선에 끝임없이 원병을 요청하였다. 임경업은 1638년에 다시 복관되고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되어 청나라 지원에 동원되었으나 명나라 군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전투는 회피하였다. 인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의주 부윤에 복귀토록 하였다. 그후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승진하였다가 1640년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주사상장(舟師上將)으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또다시 출병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명나라 군과 내통하여 군사기밀을 알려주고 청나라 군에 협조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나라 장수 홍승주가 대패하여 청나라 군에 생포되자 임경업의 이런 행적이 모두 알려지게 되었다. 청나라는 조선에 압박하여 임경업을 체포하여 심양으로 압송을 요구했다. 1642년 임경업은 체포되어 압송 중 심기원(沈器遠)의 도움으로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했다. 그의 탈출로 대신 가족이 심양으로 압송되었으며 그의 처는 심양 감옥에서 자결하였다.
임경엄은 승려로 위장하여 양주 회암사에 숨어 지내다 1643년 한강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산둥성에 도착하여 명나라에 망명하였다. 등주(현 산둥성)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가 거느린 군사 마등고(馬騰高) 휘하의 장수가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함락시키자 명의 위세는 급격히 위축되어 등주도독 황종예는 남경으로 달아나고 마등고는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1645년 임경업은 명 나라 장수 마홍주(馬弘周)의 군영에 남았다가 생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에 임경업 연루설이 나돌았다. 1646년 인조(仁祖)는 임경업 처단을 위해 청나라에 그의 송환을 요청하였고 친국(親鞫)을 받다가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刑吏)에게 장살(杖殺)되고 말았다. 1697년(숙종 23) 복관(復官),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명청 교체의 거대한 국제적 격변 속에서 대명(對明)의리의 이념을 실천하다가 비참하게 옥사한 명장의 생애는 그 뒤 깊은 애도와 공분(公憤)을 불러왔다. 그것은 [임경업전]이라는 소설로 재구성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송시열(宋時烈)ㆍ이재(李縡) 같은 조선 후기의 주요한 유학자들도 전기를 지어 그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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