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야사이야기16 코끼리에게 밝혀 죽은 판서 동물원에 가면 코끼리를 흔하게 보지만, 예전에는 코끼리가 매우 귀했다. 원래 아프리카나 인도 등에서 기르던 코끼리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 길들인 코끼리(즉 순상) 한 마리를 일본에서 보내 주어 기록상에만 보았던 코끼리의 실물을 처음으로 대하였다. 태종 11월 2일 일본 국왕이 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자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였다. 코끼리는 날마다. 콩 4~5말을 먹어 치웠다고 한다. 코끼리가 들어온 이듬해 12월에 공조 저서를 지낸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코끼리를 보고는 꼴이 추하다며 비웃고 침을 뱉었다. 코끼리가 화가 나서 그를 밟아 죽였다고 한다. 성격이 온순한 코끼리가 자리를 모욕한다고 여기고 응징을 하였다니, 화가 나도 엄청나게 났던 것 같다. 그 후에도 코끼리를 기르.. 2020. 8. 18. 시호를 잘못 정했다가 교수형을 당할 뻔하다 조선 시대에는 재상이나 유명한 유학자들이 죽으면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시호를 내려 주었다. 시호는 한 인물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내포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었으나, 점차 대상이 확대되어 고명한 유학자들에게도 시호를 내렸다. 대체로 문신이나 학자는 문文, 무신은 무武, 전쟁 등에서 공을 세운 무방은 충忠자가 앞에 붙여졌다. 조선 초기에는 대개 봉상시에서 주관하여 시호를 정한 다음 임금에게 올려 재가를 받도록 했다. 시호를 결정하는 일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직후에 시호를 잘못 정했다가 봉상시의 관원이 교수형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태조 5년 7월에 개국 공신 정희계가 죽자 시호를 정하는 문제로 임금.. 2020. 8. 13. 신臣 자를 쓰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다. 왕조 시대에는 신하가 임금에게 글을 올리면서 자기의 이름 앞이나 자기를 지칭하는 경우 반드시 신臣 자를 붙이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를 소홀히 하여 처벌을 받은 관리가 있었다. 태종 7년 12월에 파직된 안주 목사 홍유룡이다. 동지를 축하하는 글인 을 임금에게 올리면서 신 자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홍유룡의 하전을 본 의정부에서 그를 처벌하라고 주청 하자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무지한 무인이니 거론하지 말라." 이번에는 사간원이 나섰다. "홍유룡이 무녀의 소생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고, 무예의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아첨하고 뜻을 맞추어 외람되게 직임을 받아 조정의 관원에 섞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게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이욕만을 자행하여 전라도 조양 병마사로 있을 때에 관물을 도적.. 2020. 8. 11. 신하들은 세 번 이상 간하지 말라. 조선 시대는 왕과 신하들의 말싸움의 연속이었다. 말싸움에 지친 태종은 급기야 16년 6월 교지를 내려 신하들이 한 가지 사안을 세 번 이상 간하지 못하도록 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세 번이나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가 버린다는 것은 옛 법이다. 지금 대소 신료와 대간과 형조에서 간언과 상ㅇ소를 세 차례 이외에 난잡하게 신청하는 것은 예 제도에 어긋난다. 또 여러 사람들이 보고 듣는 데에는 심히 좋지 않다. 이제부터 이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교지부종으로 처벌하라." "모든 진언과 상소는 세 번 간하고 즉시 그친다. 세 번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물러가고, 서 번이나 간한 뒤에 다시 간하는 자는 처벌한다." 교지부종이란 교지를 따르지 않은 죄를 말한다. 이러한 왕명이 나오 이유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 .. 2020. 8. 11. 천인이 재상에 오른다 전통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여서 귀족이나 양반이 관리로 임용되고 노비 등의 천인은 절대 관리가 될 수 없었다고 다들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 건국 직후에는 각종 법규 등이 제대로 정비되지 못해서였는지 천인이 관리가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조선 건국 직후 궁중에서 잡일을 하는 노비인 내노 이덕시가 의성고 별감, 한장우가 보화고 별감, 이생이 의순고 별감에 임명된 적이 있다. 정조 1년 10월 사헌부에서 공인, 상인, 노비 등에게 벼슬을 주지 말고 관직을 해임할 것을 청하였다. "공인, 상인, 종들이 조정에 뒤섞이는 것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임금의 윤허를 받지는 못했다. 태종 때는 가죽을 다루는 장인이었던 임지의가 충청도 보령 감무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집안 계통이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사간원.. 2020. 8. 7. 조선 시대에도 인사 청문회가 있었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신임각료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 청문회가 열린다. 국무총리나 각 부의 장관 등은 국회의 인사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투기나 편법 증여 등의 불법적인 재산 축적, 자신과 자녀들의 부정한 군 면제, 논문표절, 부적절한 처신 등으로 청문회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하고 낙마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곤 한다. 낙마한 공직 후보자들은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고위직에 거의 접근하였다가, 청문회라는 복병을 만나 거의 이룬 꿈을 내려놓아야 해서 아마도 땅을 치고 후회하였을 것이다. 요즘은 국회 청문회 이전에 이미 언론이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는 바람에 스스로 물러나는 공직자들도 많다. 언론에 의한 검증이 국회 청문회보다 무섭다고 한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현.. 2020. 8. 6. 아이들이 왕과 왕자를 희롱하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광화문우체국 건너편에 혜정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 다리는 탐관오리들에 대한 팽형을 집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팽형은 본래 죄인을 가마솥 넣고 뜨거운 물에 삶아 죽이는 형벌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진짜 팽형을 집행하지는 않고 죄인을 가마솥에 앉혀 놓고 삶는 시늉만 하였다고 한다. 태종 13년 2월 혜정교 근처의 거리에서 곽금, 막금 , 막승, 덕중 등의 어린이들이 타구 놀이를 하고 있었다. 타구 놀이는 양편으로 나뉜 사람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공을 쳐서 일정한 금 밖으로 내보내는 놀이였다. 아이들이 가지고 졸던 공의 칭호를 하나는 주상이라 하고, 하나를 효령군이라 하고, 하나를 충녕군이라 하고 하나는 반인이라고 붙였다. 주상은 태종을, 효령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을, 충녕군은 태종.. 2020. 8. 5. 임금의 부의금은 왜 이리 많았을까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친척이나 지인들의 경조사에 내야 하는 축의금이나 부의금이 아닐까? 이번에는 과연 얼마를 내야 할까가 그야말로 큰 고민거리다. 조선 시대에도 임금들은 종친이나 재상 등의 고위직을 역임한 신하들이 사망하면 부의금을 하사하였다. 부의금만이 아니라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고 시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태종 5년 12월에 제정된 예장식이라는 법규를 보자. 종1품 이사의 대신이 죽으면 예장하고 시호를 주며, 정2품 관원은 시호로 주고 부의를 보낸다. 종2품 관원은 다만 부의만 을 준다. 검교정승은 예장을 행하게 한다." 예장은 국왕이나 왕비 등에 대한 국장에 버금가는 장례 의식으로, 나라에서 일체의 장례 비용, 물자, 인부 등을 공급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 2020. 8. 4. 조선에서도 솔로몬의 재판이 있었다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솔로몬 왕은 명하였다. '그럼 아이를 반을 갈라서 공평하게 나눠 가져라." 그러자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저 여인에게 아이를 주십시오." 솔로몬 왕은 그 여인을 친엄마로 판결하여 아이를 주게 하였다. 3천 년 전에 있었던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다. 솔로몬의 재판이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 솔로몬의 지혜로움을 보여 주는 증거라면 태종의 자애로움을 나타내 주는 사례도 있다. 태종 11년 6월 형조에서 편ㄱ하기 어려운 두 가지 사건에 대한 판정을 임금에게 요청한 일이 있었다. 두 사건은 모두 모자간의 문제였다. 형조 판서 임정이 임금에게 판정을 청하였다. "형조에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 2020. 8. 4.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