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이귀 등과 인조반정을 성공시켰으며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 사림세력의 등용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이후 유배되었다가 아들 김익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되었다.
본관 안동. 자 성지(成之). 호 낙서(洛西). 성혼(成渾)의 문인.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동지를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해바친 김질(金礩)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억령이다.
음보로 출사해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 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 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자 1등공신으로 책록되었는데 공적보다 실세였던 김상궁에게 상당한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귀의 딸과 김자점의 동생이 혼인을 하여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김자점의 동생이 병약하여 일찍 죽는 바람에 이귀의 딸 이예순은 궁중의 무수리가 되었다. 이예순이 무수리로 있으면서 김상궁의 눈에 들자 연줄을 대었던 것이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조정(趙挺) 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고,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반정 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공신녹훈을 전후해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자,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급한 성격과 다혈질의 기질로 순검사(巡檢使) ·한성판윤 등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고 강직하다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옥에 있던 기자헌(奇自獻) 등 40여 인의 인사들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죽이자고 주장하였다. 인조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1625년(인조 3년) 윤인발의 딸을 동궁비로 간택하려는데 역적의 자손이라 불가하다고 간언하자 삭탈관직시켜 버렸다. 그러다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병권에 적임자가 없어 다시 등용되었다. 정묘호란 때 왕실을 호종한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고 서북쪽을 방어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 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이후 공신 세력의 권력 추구와 패전에 대해 심한 공격을 하는 일반 사류들에 의해 계속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1642년 병조판서, 164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같은 해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44년에는 경쟁 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 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부분의 공신 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 사류들은 인조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 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해 인조의 의구심을 받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듯하다.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 시해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혼인시켜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 무리들과 결탁해 청나라의 후원을 얻어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인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김상헌(金尙憲)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해 1650년(효종 1)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가 즉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해 조사했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김익(金釴)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김자점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기진흥(奇震興)·이파(李坡)·심지연(沈之演)·황헌(黃瀗) 등도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 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 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 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 행위 등 당시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해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그는 문과 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 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 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 행위, 역적질 등 당시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해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간신으로 후세에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 김자점의 죽음에 대해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효종이 김자점에게 너는 내 형님의 원수니 귀양가라 하였는데 이건 헛소리다. 효종은 정통성 문제에 민감하여 소현세자 부부와 친했어도, 나중에 왕위에 오를 때 형수인 민회빈 강씨를 역강(역적 강씨)이라 부르고, 그녀를 입에 올리는 자는 엄벌에 처할 거라고 경고할 정도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효종이 김자점을 제거한 것은 그저 김자점이 장차 자신의 권위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였다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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