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실록>은 조선왕조 제17대 왕인 효종 1619년 5월에서 1659년 5월의 재위기간 10년간의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으로, 정식 명칭은 <효종대왕실록>이다. <효종실록>은 본문 21권 21책과 효종의 행장, 지문, 시책문, 애책문 등이 수록된 부록을 합쳐 총22책으로 구성되었다. 활자로 간행되었으며, 조서왕조 다른 실록들과 합쳐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었다. <효종실록>은 효종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660년 현종1년 5월에 시작하여 익년 2월에 완성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 관원은 아래와 같다.
총재과 - 영춘추관사 이경석, 도청당상 - 지춘추관사 홍명하 , 채유후, 동지춘추관사 - 이일상, 도창낭청 - 목겸선, 조귀석,심세정, 김수흥, 지춘추관사 - 허적, 동춘추관사 - 김수향 등이다.
묘호는 효종, 존호는 선문장무신성현인이며, 능호는 영릉으로 처음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경내에 있었으나, 1673년 현종14년에 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세종의 영릉 뒤편으로 옮겼다.
<효종실록>의 내용
효종의 휘는 호, 자는 정연이고, 인종와 인열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이다. 1619년 5월 22일 한성부 경행방에서 태어났고, 1626년 인조4년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으 명으로 아우인 인평대군과 함께, 왕조들과
강화도에 피난하였으나, 이듬해 강화도로가 함락되고 인조가 항복하자 형 소션세자 및 삼학사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1645년 4월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그는 청나라에서 돌아와 9월 27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으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사림정치의 이상을 내세우고 북벌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충청도 지역의 재야 학자들을 조정에 대거 등용하였다. 1659년 6월 김집을 성두로 송시열, 송준길 등이 조정에 들어왔다. 그들은 정계에 진출하자 김자점 및 원두표 중심의 훈구세력을 탄핵하고, 1651년 효종2년에 조귀인 옥사를 계기로 친정파 김자점을 비롯한 낙당계 관료들을 조정에서 제거하였다. 원당계에서도 이행진과 이시해 등 중진들이 파직되었다.
효종 10년인 1659년 3월에 이조판서 송시열과 효종에 의해 북벌계획이 논의되었다. 이때 효종은 양병에 치중하 북벌정책을 내세웠고, 송시열은 원칙론만 내세웠다. 효종이 주도한 군비 증강 계획은 중앙군의 강화와 수도 방위에 역접을 두엇다. 효종은 군비 강화를 내세우면서도 대동법의 확대 등을 통하여 국가 재정의 확보책에 주력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왕권강화와 직결된 문제였다. 1659년 5월 횽종은 얼굴의 종기가 악화되어 갑자기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조용하며, 인조와 비슷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효심이 지극한 효종은 인조의 사랑을 받았다.
병자호란으로 효종은 강화도 피난을 가지만 결국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가 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갔다.
볼모로 있으며 형인 소현세자를 보필하고, 약 9년여의 볼모 생활을 하다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효종은 오랜 볼모생활과 아버지였던 인조의 효심으로 인조에게 치욕을 안겨준 청에대한 반감이 강했다.
왕의 자리에 오른후 효종은 북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10년여의 재위기간동안 북벌운동에 힘썼다. 또한 이는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국방강화와 함께 무기의 개량 및 군사훈련 강화에 많은 노력을 했다. 군비확충과 함께 지난 외구의 침략에 피폐해진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유통하기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효종의 강한 의지에도 북벌은 이루어 지지 못했고 국가 재정은 쉽게 안정되지 못했다.
효종은 재위 10여년 만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했다. 효종 역시 심각한 종기가 있었는데. 종기의 고름을 짜기위해 침을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여,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갑작스런 죽음에 효종역시 타살에 의문을 품었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효종의 태실이야기 : 17대 임금 효종의 태실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첫째 아들은 소현세자)이었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이 왕세자로 책봉됐다. 광해군 재위 기간인 1619년에 태어났으므로 태실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종 북벌의 꿈 그리고 동반자 송시열 (0) | 2020.06.11 |
---|---|
조선 17대 왕 효종 - 이호 (0) | 2020.06.10 |
삼전도의굴욕 - 인조의 굴욕과 나라의 슬픔 (0) | 2020.06.04 |
김자점, 인조반정의 공신? 나라의 역적!! (0) | 2020.06.03 |
남한산성 45일간의 전투 (0) | 2020.06.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