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7대 왕(재위 1649∼1659).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다.
효종의 휘(諱) 호(淏). 자 정연(靜淵). 호 죽오(竹梧). 시호 명의(明義). 인조(仁祖)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 청주 한씨이며, 부인은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이다. 효종은 13세에 한 살 위인 인선왕후와 혼인하여 1남 6녀를, 후궁인 안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다.
효종은 인조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인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에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인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때 효종의 나이는 5세였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장난치거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행실이 무척 달랐다고 하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모습은 부친인 인조와 비슷하다. 또한 효심이 극진하여 채소나 과일같이 흔한 음식도 먼저 부친에게 올린 뒤에야 먹곤 했다. 인조는 효종을 두고 항상 인성이 훌륭하고 효심이 지극하다고 칭찬하여 주위의 사랑과 기대가 각별했다고 전한다. 1625년(인조 3)에 일곱 살 위인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먼저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효종이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8세가 되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효종은 인조의 명령으로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 아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1월 30일 효종은 부친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황제에 대한 경례법)’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지켜보아야 했다. 2월 5일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볼모가 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갔다. 볼모지로 가는 도중에 등에 업혀가던 세 살난 딸이 병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청나라에 가서는 소현세자와 함께 명청(明淸)의 격전지를 따라다녀야 했다. 그 사이 형제간의 우애는 점점 돈독해졌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고집하였고,서역을 공격할 때에도 소현세자와 끝까지 동행하여 그를 보호했다.
효종은 1642년(인조 19)에 심양 관저에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을 낳았다. 현종은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왕이다. 효종은 26세인 1644년(인조 22)에 청나라에 있은 지 8년 만에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청나라가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하자 소현세자와 함께 북경으로 들어갔다. 효종의 완전한 귀국은 1645년 5월 14일이다. 효종보다 앞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4월 26일에 급서(急逝)하자 20여일 만에 살얼음판 같은 본국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1645년 9월 27일, 효종은 27세의 나이로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소현세자의 부인과 그 집안은 철저하게 몰락했다.
강빈의 신원을 주장하던 김홍욱이 맞아 죽자 민심은 요동치자 효종은 김홍욱 사건을 무마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으니, 그 중 하나가 북벌이다. 그는 김상헌의 제자로 유배중이던 조석윤을 동지중추부사로 등용하고 송시열을 이조참의로 등용하는 등 북벌을 대의로 내세우면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다. 효종은 또 두 차례의 외침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경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1652년에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했다.
효종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신하들과 함께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여 군사를 양성하고 군비를 확충하였다. 하지만 북벌정책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목소리도 높았으며 무관을 하대하는 풍조는 여전했다. 당시 효종의 북벌정책을 지지한 박서, 원두표(元斗杓) 등을 차례로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무장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여 군사력 증강에 노력했다. 한때 유배 중이던 김자점이 청나라에 북벌정책을 밀고하여 기밀이 누설되어 고초를 겪었으나, 이를 잘 무마하고 계속 북벌을 위한 군비의 확충을 기하여 군제의 개편, 무관을 우대하는 등용 정책을 펼쳤고,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1654년에는 한강변에서 1만 3000명의 병사가 펼치는 대대적인 관병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제주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과 그의 일행들에게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여 그 무기를 시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1654년 러시아·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의 북벌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이자 종속관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목표는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에 불과했다. 효종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효종은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송시열은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질 뿐이었다.
북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졌던 효종은 1659년 5월,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각했고 이에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아 처음에는 고름을 조금 짜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아침에 침을 맞은 효종이 사시(巳時: 오전 9시에서 11시)에 승하하였다고 하니 침을 맞자마자 운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궐 뜰에 있던 송시열과 정태화가 비보를 듣고 뛰어들어 갔지만, 효종의 싸늘한 주검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효종은 한마디 유언도 없이 승하했다.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타살설’에 무게를 두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효종의 종기를 터트려 죽게 만든 신가귀는 수전증이 심한 의원이었다. 그런데 종기를 터트리도록 명을 내린 사람은 효종 자신이었다. 이전에 효종이 말에서 떨어져 낙상으로 볼기에 종기를 앓았는데 신가귀가 침을 놓아 고쳤고, 이를 신뢰한 효종이 이번에도 그에게 침을 놓게 한 것이다. 그러나 수전증이 있었던 신가귀는 혈맥을 범하였다. 일설에는 신가귀가 혈맥을 잘못 범한 것이 아니라 종독(腫毒: 종기의 독)이 심하여 이것이 흉부에까지 퍼졌고 혈도(血道)가 종기에 집중되었는데, 함부로 침을 놓아 터뜨렸다고도 한다. 결국 효종을 죽게 만든 신가귀는 참형은 면하고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효종 승하 그날의 기록 <승정원일기>
1659년 5월 1일 ( 승하 3일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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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德宮에 머묾。常參과 經筵을 정지함
○ 上在昌德宮。停常參·經筵。 ○ 上在昌德宮。停常參·經筵。 -
종기의 痛勢와 世子의 병환에 대해 묻는 元斗杓 등의 계
○ 藥房都提調領中樞府事臣元斗杓, 提調兵曹判書臣洪命夏, 副提調行都承旨臣趙珩啓曰, 伏未審夜來, 自上所患膿處, 出汁幾何, 而浮氣及煩熱等候, 與昨尙無輕重耶? 世子昏後之候, 亦何如? 臣等不勝憂慮, 敢來問安。答曰, 浮氣日漸如此, 而諸醫徒事泛泛, 卿等亦勿泛泛也。 ○ 藥房都提調領中樞府事臣元斗杓, 提調兵曹判書臣洪命夏, 副提調行都承旨臣趙珩啓曰, 伏未審夜來, 自上所患膿處, 出汁幾何, 而浮氣及煩熱等候, 與昨尙無輕重耶? 世子昏後之候, 亦何如? 臣等不勝憂慮, 敢來問安。答曰, 浮氣日漸如此, 而諸醫徒事泛泛, 卿等亦勿泛泛也。 -
元斗杓 등이 世子宮의 안부를 물음
○ 世子宮問安。答曰, 知道。 ○ 世子宮問安。答曰, 知道。 -
受鍼 후 三提調가 문안함
○ 受鍼後, 三提調問安。答曰, 知道。 ○ 受鍼後, 三提調問安。答曰, 知道。 -
牛黃末을 들이라는 전교
○ 傳曰, 進御牛黃末, 入之。 ○ 傳曰, 進御牛黃末, 入之。 -
入診하겠다는 藥房의 두 번째 계
○ 藥房再啓曰, 伏未審此時, 聖候諸症, 與臣等入診時, 加減, 何如? 凡腫症, 勿論輕重, 朝夕變異, 卽與醫官入診, 似不可已, 竝此仰稟。答曰, 與朝無異, 入診則暑退後, 臨夕爲之, 可也。 ○ 藥房再啓曰, 伏未審此時, 聖候諸症, 與臣等入診時, 加減, 何如? 凡腫症, 勿論輕重, 朝夕變異, 卽與醫官入診, 似不可已, 竝此仰稟。答曰, 與朝無異, 入診則暑退後, 臨夕爲之, 可也。 -
受鍼 후 三提調가 문안함
○ 受鍼後, 三提調問安。答曰, 知道。藥房謄錄
1659년 5월 2일 (승하 2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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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德宮에 머묾。常參과 經筵을 정지함
○ 上在昌德宮。停常參·經筵。 ○ 上在昌德宮。停常參·經筵。 -
종기의 浮氣 등과 世子의 병환에 대해 묻는 元斗杓 등의 계
○ 藥房都提調領中樞府事臣元斗杓, 提調兵曹判書臣洪命夏, 副提調行都承旨臣趙珩啓曰, 伏未審夜來, 頭部當處濃汁之出, 眼胞浮氣及煩熱寢睡, 視昨加減, 何如? 世子昏後, 亦何如? 臣等不勝憂慮, 敢來問安。且今又趁早入診似當, 竝此仰稟。答曰, 依啓。諸症與昨無異, 世子所患, 幾至差愈矣。 ○ 藥房都提調領中樞府事臣元斗杓, 提調兵曹判書臣洪命夏, 副提調行都承旨臣趙珩啓曰, 伏未審夜來, 頭部當處濃汁之出, 眼胞浮氣及煩熱寢睡, 視昨加減, 何如? 世子昏後, 亦何如? 臣等不勝憂慮, 敢來問安。且今又趁早入診似當, 竝此仰稟。答曰, 依啓。諸症與昨無異, 世子所患, 幾至差愈矣。 -
元斗杓 등이 世子宮의 안부를 물음。入診 후 三提調가 문안함
○ 世子宮問安。答曰, 知道。入診後, 三提調問安。答曰, 知道。 ○ 世子宮問安。答曰, 知道。入診後, 三提調問安。答曰, 知道。 -
入診하겠다는 藥房의 두 번째 계
○ 藥房再啓曰, 伏未審此時, 自上所患當處出汁, 眼胞浮氣及煩熱等候, 與臣等入侍時, 何如? 臣等不勝憂慮, 敢此問安。且與諸醫臨夕入診, 亦不可已, 竝此仰稟。答曰, 諸症與昨無異, 今日雨濕, 入診姑勿爲之, 可也。藥房謄錄
1659년 5월 3일 ( 승하 하루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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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德宮에 머묾。常參과 經筵을 정지함
○ 上在昌德宮。停常參·經筵。 ○ 上在昌德宮。停常參·經筵。 -
종기의 병세와 世子의 병세에 대해 묻는 元斗杓 등의 계
○ 藥房都提調臣領中樞府事元斗杓, 提調兵曹判書臣洪命夏, 副提調行都承旨臣趙珩啓曰, 伏未審夜來, 自上所患當處出汁, 眼胞浮氣及煩熱寢睡等候, 加減, 何如? 世子昏後之候, 已得平復耶? 臣等不勝憂慮, 敢此問安。且今日趁早入診, 亦不可已, 竝此仰稟。答曰, 依啓。諸症時無現效, 世子旣已平常矣。 ○ 藥房都提調臣領中樞府事元斗杓, 提調兵曹判書臣洪命夏, 副提調行都承旨臣趙珩啓曰, 伏未審夜來, 自上所患當處出汁, 眼胞浮氣及煩熱寢睡等候, 加減, 何如? 世子昏後之候, 已得平復耶? 臣等不勝憂慮, 敢此問安。且今日趁早入診, 亦不可已, 竝此仰稟。答曰, 依啓。諸症時無現效, 世子旣已平常矣。 -
受鍼後 三提調가 문안함
○ 受鍼後, 三提調問安。答曰, 知道。 ○ 受鍼後, 三提調問安。答曰, 知道。 -
탕약을 劑入하고 入診하겠다는 藥房의 계
○ 藥房夕問安啓曰, 伏未審此時, 自上所患諸症, 與朝入侍時, 加減, 何如? 卽伏聞下醫官之敎, 泄瀉之候, 更發於朝後, 尤不勝驚慮之至, 退與柳後聖等及諸御醫商議, 則皆以爲, 昨日滑便之症, 今變爲泄瀉, 進御三白湯二三貼, 以防泄瀉, 宜當云。此藥三貼, 姑先劑入。且所患當處及面部浮氣, 不可不臨夕入診, 竝此仰稟。答曰, 依啓。 ○ 藥房夕問安啓曰, 伏未審此時, 自上所患諸症, 與朝入侍時, 加減, 何如? 卽伏聞下醫官之敎, 泄瀉之候, 更發於朝後, 尤不勝驚慮之至, 退與柳後聖等及諸御醫商議, 則皆以爲, 昨日滑便之症, 今變爲泄瀉, 進御三白湯二三貼, 以防泄瀉, 宜當云。此藥三貼, 姑先劑入。且所患當處及面部浮氣, 不可不臨夕入診, 竝此仰稟。答曰, 依啓。 -
入診後 三提調가 문안함
○ 入診後, 三提調問安。答曰, 知道。藥房謄錄
1659년 5월 4일 효종의 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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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德宮에서 승하함
○ 上在昌德宮。午時昇遐。 ○ 上在昌德宮。午時昇遐。 -
환후를 묻고 醫官과 함께 入診하기를 청하는 元斗杓 등의 계
○ 藥房都提調領中樞府事臣元斗杓, 提調兵曹判書臣洪命夏, 副提調行都承旨臣趙珩啓曰, 伏未審夜來, 自上所患當處眼𩬡[胞]浮氣及煩熱困惱等候, 與昨輕重, 何如? 泄瀉之症, 亦何如? 臣等不勝憂慮, 敢來問安。且今又與醫官入診, 亦不可已, 竝此仰稟。答曰, 依啓。諸症時無加減矣。 ○ 藥房都提調領中樞府事臣元斗杓, 提調兵曹判書臣洪命夏, 副提調行都承旨臣趙珩啓曰, 伏未審夜來, 自上所患當處眼𩬡[胞]浮氣及煩熱困惱等候, 與昨輕重, 何如? 泄瀉之症, 亦何如? 臣等不勝憂慮, 敢來問安。且今又與醫官入診, 亦不可已, 竝此仰稟。答曰, 依啓。諸症時無加減矣。 -
탕약를 올리겠다는 藥房의 두 번째 계
○ 再啓曰, 卽者諸醫等商議, 則皆以爲, 自上困惱之候, 出於累度泄瀉, 中氣虛弱之致, 升陽益胃散, 入升氣補脾兼治腫毒之劑, 引飮之時, 亦連進和砂〈糖〉屑生脈散, 宜當云。升陽益胃散三貼, 生脈散五貼, 竝砂糖屑劑入, 何如? 答曰, 依啓。 ○ 再啓曰, 卽者諸醫等商議, 則皆以爲, 自上困惱之候, 出於累度泄瀉, 中氣虛弱之致, 升陽益胃散, 入升氣補脾兼治腫毒之劑, 引飮之時, 亦連進和砂〈糖〉屑生脈散, 宜當云。升陽益胃散三貼, 生脈散五貼, 竝砂糖屑劑入, 何如? 答曰, 依啓。 -
入診할 때 三提調와 醫官들이 입시하고 申可貴가 집침함
○ 入診正時辰初, 入侍三提調醫官柳後聖·申可貴, 朴頵·趙徵奎·崔栶·李後聃, 受鍼當處, 出膿血, 執鍼申可貴。 ○ 入診正時辰初, 入侍三提調醫官柳後聖·申可貴, 朴頵·趙徵奎·崔栶·李後聃, 受鍼當處, 出膿血, 執鍼... -
피를 그치게 하는 藥을 들이라는 전교
○ 傳于掌務官曰, 血竭急急, 作末以入, 卽爲入之。 ○ 傳于掌務官曰, 血竭急急, 作末以入, 卽爲入之。 -
피를 그치게 하는 藥을 들이라는 전교
○ 又傳曰, 血竭多數入之, 卽爲入之。 ○ 又傳曰, 血竭多數入之, 卽爲入之。 -
피를 그치게 하는 藥을 급하게 제조하여 계속해서 들이라는 전교
○ 又傳曰, 此外止血之藥, 急急劑入, 石灰末·血竭末·紫檀香末·槐花末·百草霜末·瓦粉末, 三提調監劑, 連屬入之。 ○ 又傳曰, 此外止血之藥, 急急劑入, 石灰末·血竭末·紫檀香末·槐花末·百草霜末·瓦粉末, 三提調監劑, 連屬入之。 -
醫官을 모두 불러서 獨蔘湯과 淸心元 등을 계속 劑入하라는 전교
○ 又傳曰, 今日入侍醫官, 竝爲還入, 使之付藥, 入侍醫官出言曰, 自上有氣逆之候, 議定陳皮竹茹湯, 而一貼急急劑入。且劑獨蔘湯二貼, 一貼則封入, 一貼則方煎之時, 自上氣甚不平, 淸心元·竹瀝·薑汁, 連續入之, 所煎獨蔘湯, 亦爲入之, 則自上幾盡進御, 又煎毒[獨]蔘湯, 連續入之, 淸心元·童便·竹瀝·薑汁, 亦爲頻頻入之。 ○ 又傳曰, 今日入侍醫官, 竝爲還入, 使之付藥, 入侍醫官出言曰, 自上有氣逆之候, 議定陳皮竹茹湯, 而一貼急急劑入。且劑獨蔘湯二貼, 一貼則封入, 一貼則方煎之時, 自上氣甚不平, 淸心元·竹瀝·薑汁, 連續入之, 所煎獨蔘湯, 亦爲入之, 則自上幾盡進御, 又煎毒[獨]蔘湯, 連續入之, 淸心元·童便·竹瀝·薑汁, 亦爲頻頻入之。 -
昇遐함。염습을 행하고 藥房이 大妃殿 등의 안부를 물음
○ 午正昇遐。襲後, 大妃殿·中宮殿·世子宮, 奉慰問安。答曰, 罔極。已上藥房謄錄 ○ 午正昇遐。襲後, 大妃殿·中宮殿·世子宮, 奉慰問安。答曰, 罔極。已上藥房謄錄 -
執鍼醫官 및 入侍醫官 등을 拿囚하기를 청하는 承政院의 계사
○ 政院啓辭, 執鍼醫官及入侍醫官等, 竝令拿囚之意, 敢達。依達, 柳後聖·李後聃·崔棞·申可貴·朴頵·趙徵奎, 拿囚。 ○ 政院啓辭, 執鍼醫官及入侍醫官等, 竝令拿囚之意, 敢達。依達, 柳後聖·李後聃·崔棞·申可貴·朴頵·趙徵奎, 拿囚。 -
襲奠에 소용되는 香床을 進排치 않은 繕工監 官員을 拿推하기를 청하는 承政院의 진달
○ 又達曰, 襲奠所用香床, 分付累度催促, 而尙不進排, 以致設奠漸遲, 極爲痛駭, 繕工監當該官員, 請拿推, 何如? 依達。 ○ 又達曰, 襲奠所用香床, 分付累度催促, 而尙不進排, 以致設奠漸遲, 極爲痛駭, 繕工監當該官員, 請拿推, 何如? 依達。 -
襲奠에 소용되는 물품을 進排치 않은 奉尙寺 官員을 拿推하기를 청하는 殯殿都監의 계
○ 殯殿都監啓曰, 襲奠之物, 奉尙寺當爲進排, 而豫先分付, 累度催促。今日夜深, 尙不備呈, 以致襲奠差遲, 本寺當該官員, 請拿推, 何如? 依達。 ○ 殯殿都監啓曰, 襲奠之物, 奉尙寺當爲進排, 而豫先分付, 累度催促。今日夜深, 尙不備呈, 以致襲奠差遲, 本寺當該官員, 請拿推, 何如? 依達。 -
國恤을 당하여 일이 많기 때문에 全南道에 있는 愼天翊 대신에 尹順之를 禮曹參判으로 임시 차출하여 長生殿의 일을 돌보게 할 것을 청하는 院相의 진달
○ 院相達曰, 禮曹參判, 例兼長生殿提調, 當此國恤, 多有檢務之事, 而禮曹參判愼天翊, 遠在全南道, 似難等待, 改差, 其代, 以副護軍尹順之, 權差察任, 何如? 答曰, 依達。長生殿謄錄 ○ 院相達曰, 禮曹參判, 例兼長生殿提調, 當此國恤, 多有檢務之事, 而禮曹參判愼天翊, 遠在全南道, 似難等待, 改差, 其代, 以副護軍尹順之, 權差察任, 何如? 答曰, 依達。長生殿謄錄 -
小歛때 입는 變服을 바로 들이지 않은 관원을 모두 推考하기를 청하는 院相의 진달
○ 達曰, 禮曹儀注, 小歛[斂]變服中, 腰絰缺書以入, 而不卽付標, 致勤下令, 該曹缺當該堂上郞廳, 竝行公推考, 何如? 答曰 缺 ○ 達曰, 禮曹儀注, 小歛[斂]變服中, 腰絰缺書以入, 而不卽付標, 致勤下令, 該曹缺當該堂上郞廳, 竝行公推考, 何如? 答曰 缺 -
小歛때의 禮와 梓宮의 長廣이 差誤가 있음을 논의함
○ 達曰, 小歛[斂]時大臣以下入侍, 意非偶然, 禮缺記, 而禮曹判書尹絳, 未及擧行, 難缺推考, 何如? 答曰, 依達。缺臣於此議, 前後持難, 只爲缺若以舊典爲謬, 而今不可不改云爾。缺爲自是之言乎? 唯在參酌裁處, 延。缺以爲, 臣非不知此論之出於古賢定制缺但擧措重大, 事在蒼黃, 先王成缺久, 則從前此論之不得行, 有由然矣。此臣缺也。左議政沈之源以爲, 臣之愚陋之見, 已陳缺學, 何敢更容他議? 領中樞府事元斗杓缺有同矇瞽, 只以遽變祖宗舊典缺定之制, 安敢有異議? 惟在裁處之得。缺厚源以爲, 臣雖昧於禮學, 非以古禮缺宗朝所未行之事, 倉卒之際, 恐難缺凡人之見, 則莫不爲難, 人情所在, 亦難缺節節妨礙難通之事, 此臣所以不敢容缺處, 我國典禮所載, 其在爲人臣服缺然前後知禮之臣, 必欲略加損益, 以爲近缺甚美, 但諸大臣獻議, 一向持難, 必有定見, 缺不得歸一, 臣等素昧禮文, 亦不敢擅冒折缺賜裁處。答曰, 依諸大臣議施行, 缺長廣以小斂見樣缺 院相鄭太和與禮曹判書尹絳缺宋時烈·右參贊宋浚吉, 同往招鄭缺長則不足者, 只分許, 庶乎用之, 而廣則缺足幾二寸許矣。若謂小斂之錯議, 則缺多用衣服而亦可準用, 當肩處, 則不至缺□其厚幾許, 而若是不足, 以此觀之, 則缺而絞布亦不至緩, 然諸大監親自奉審缺鄭太和請摠護使沈之源同入奉審缺尹絳, 吏曹判書宋時烈, 右參贊浚吉缺金壽恒, 注書孟胄瑞, 史官宋昌缺殿廡下, 請內侍開閣, 院相以下至缺後, 左右見樣, 立標尺量, 則果與善, 宋浚吉又言執事者尺之, 則長亦不足缺退出廡下, 聚首商議, 請承傳色上缺次曰, 到此地頭, 臣等益復罔極, 前日備望缺長生殿所儲內梓宮之中, 他無準尺缺外梓宮之類, 或覓於閭家所儲之處, 缺當如乙卯年仁烈王后梓宮缺, 亦或一道, 而可合之材, 終不可得, 則其缺連板以用, 敢此仰稟。答曰, 到此缺之用, 則閭家尙且不爲, 決知其不可缺, 使之無憾於大事, 院相更缺也。如不得美好之材, 而用缺上不欲用之, 奈何? 宋浚吉曰, 缺不可徑請矣。院相曰, 私禊所儲缺都監郞廳, 看檢擇入, 如何? 尹絳缺郞廳看品, 而江干則出得鄭善興否缺鄭善興, 急急給馬出送, 可矣。遂罷。缺 ○ 達曰, 小歛[斂]時大臣以下入侍, 意非偶然, 禮缺記, 而禮曹判書尹絳, 未及擧行, 難缺推考, 何如? 答曰, 依達。缺臣於此議, 前後持難, 只爲缺若以舊典爲謬, 而今不可不改云爾。缺爲自是之言乎? 唯在參酌裁處, 延。缺以爲, 臣非不知此論之出於古賢定制... -
梓宮을 살펴보니 差誤의 염려가 있다는 진달
○ 達曰, 梓宮見樣等, 親爲奉審, 則廣缺或不無差誤之患, 臣等領率長生殿缺何如? 答曰, 卿等旣已奉審, 似無未缺可用之木, 則更爲看審, 非但苟且, 匠工缺意則決難許入矣。 ○ 達曰, 梓宮見樣等, 親爲奉審, 則廣缺或不無差誤之患, 臣等領率長生殿缺何如? 答曰, 卿等旣已奉審, 似無未缺可用之木, 則更爲看審, 非但苟且, 匠工缺意則決難許入矣。 -
李應蓍 등이 진달함
○ 申時, 大司憲李應蓍, 掌令黃儁耉, 持平李柙, 獻納鄭缺昨日所達, 臣等服制正訛之論, 實本 以上燼餘 ○ 申時, 大司憲李應蓍, 掌令黃儁耉, 持平李柙, 獻納鄭缺昨日所達, 臣等服制正訛之論, 實本 以上燼餘 -
梓宮의 長廣이 부족하여 판자를 붙이는 공역을 五日 저녁에 시작하여 六日 아침에 마침
○ 朝廷以問安詣闕, 而本殿提調工曹判書鄭致和, 稟于都提調領議政鄭太和, 殿上內梓宮中寒字內梓宮以入事定奪後, 提調以下郞廳, 卽進于本殿, 梓宮結裹, 初五日奉詣仁政殿東月廊內, 塗諸具整齊時, 從內出見樣, 則梓宮長廣不足, 不得已朝廷, 以他梓宮新造以用事議政[定]後, 殿內梓宮豫備板八葉, 輸入差備門內, 初五日夕始役, 達夜造成, 而天地板則連椄, 初六日朝前畢造, 卽於其令殯殿都監, 造作土宇, 梓宮內外三度着漆, 初八日朝, 自其處由協陽門, 奉詣仁政殿後仁和門內, 仍爲內塗, 改結裹以入。長生殿謄錄
효종 승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1659년 5월 4일
현종실록1권, 현종 즉위년 5월 4일 갑자
- 효종 선문장무 대왕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다
- 정오 임종시에 정중휘로 하여금 ‘대점’ 두 글자를 써서 밖에 내다 보이게 하다
- 심지원을 총호사로 평운군 이구를 수릉관으로 삼다
- 장선징 등을 내지로 불러들여 염습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다
- 어의 신가귀·유후성 등 6명을 의금부에 하옥하다
- 영의정 정태화를 원상으로 삼다
- 저녁에 큰 비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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