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전투는 병자호란 때인 1637년 1월 10일부터 2월 24일까지 45일 동안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청나라 군대에 맞서서 인조(仁祖)와 조선의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벌였으나, 포위되어 고립되자 항복하였다
1636년 12월 28일 선양[瀋陽]을 출발한 청나라 군대의 주력은 1637년 1월 5일 압록강 북안의 진강(鎭江)을 거쳐 조선으로 진입했다. 청나라 군대는 정묘호란 때와는 달리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의주의 백마산성(白馬山城), 평양의 자모산성(慈母山城),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 등을 우회해서 한양으로 향했다. 때문에 조선의 조정은 청나라 군이 개성 부근에 이르른 1월 8일에서야 전쟁이 발발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이미 개성 부근까지 남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심기원(沈器遠)으로 하여금 한양을 지키게 하고, 강화도로 피난을 준비했다. 1월 9일 봉림대군(鳳林大君)ㆍ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왕자들과 세자빈 등의 왕족들이 먼저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날 저녁 인조도 강화도로 가기 위해 궁을 나섰는데, 마부타의 돌격대가 이미 양철평(良鐵坪, 지금의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인조는 신경진(申景禛)으로 하여금 이들을 막게 하고, 자신은 도성을 빠져나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1월 10일 인조는 김류(金瑬)의 건의로 남한산성을 벗어나 강화도로 가려고 했지만, 눈이 내려 이동이 어려워지자 포기했다.
청군 선견대가 양화진 및 개화진에 진출하여 한강 하구를 봉쇄하였으므로 국왕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 일행이 성에 들어갔을 때 남한산성에는 미곡 14,300여석, 피·잡곡 9,500석, 장 220여독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는 1만여 병력이 2개월 이상 버티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이었으나 이때는 군사뿐 아니라 왕실과 종친, 문무관료, 서리, 노비 등 14,300여명이 들어와 장기 농성시 양곡 부족이 우려되었다. 산성방어를 맡은 조선군 병력은 광주진관 소속군병들과 경군인 어영청 총융청, 훈련도감 군인 등 모두 13,800여명이었다.
12월 15일 2천여명의 청군 병력은 강화도와 통하는 한강 수로를 차단하였으며 다시 4천여명을 이동시켜 신천나루를 장악하고 삼전나루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남한산성 서쪽까지 진출하여 통로를 봉쇄하고 본군 도달시까지 대기하였다. 이어서 12월 19일에 청 좌익군 24,000명이 모두 당도하자 이들은 남한산성의 동편과 남쪽에 분산 배치되어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12월 15일부터 청군은 기병 100여기를 서문에 접근시켜 형세를 정탐하였고 조선군은 12월 18일에 원두표가 이끄는 50여 명이 북문을 통해 나가 청군을 공격하여 6명을 사살하는 등 같은 달 21일까지 몇 차례 출성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같이 몇 차례 탐색전이 있었으나 양군이 정면 대결한 것은 아니었다. 청군은 견제공격을 통해 출성 및 연락을 방해하고 본대가 포위망을 완전히 굳히는 동안 지연전을 폈다. 그러나 조선군은 청군의 정세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출성 공격이나 어가의 이동을 도모할 수 없었다.
12월 22일 청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청군은 아침나절부터 5천여 병력을 동원하여 각 문에 1천여 명씩 배치하고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화포를 동시에 사격하여 돌격부대를 엄호하고 운제와 당차 등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조선군도 화포 사격을 가하고 화살과 돌을 날려 청군을 공격하였으며 정오 무렵 청군은 성과 없이 후퇴하였다. 이튿날에도 청군은 1만여 명을 동원하여 공세를 폈다. 아침 일찍부터 청군이 성벽에 접근하자 조선군은 전날과 달리 청군이 공격진영을 갖추기 전에 병력을 내보내어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출성한 조선군과 청군은 성 아래에서 백병전을 벌였고 다시 성벽을 두고 양측의 군대는 정오까지 공방전을 벌였다.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80여명이 전사하고 청군 200여명을 사살하였다.
두 차례의 집중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군은 남한산성을 단기간에 함락하여 항복을 받아내기는 곤란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작전을 바꾸어 성을 외부와 완전히 고립시키려 하였다. 청군은 성 외곽의 주요 통로에 수십 군데의 목책을 설치하여 통로를 차단하고 복병을 두었는데 이 때문에 남한산성의 방어군과 외부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되고 말았다.
12월 29일 한양에 입성한 청 태종이 4만여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 부근으로 진군하여 청군의 군세가 더욱 강해졌다. 청군의 포위망이 강화되는 반면 남한산성 안의 조선군은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여 점차 군량이 부족해져갔다. 각 도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근왕군들은 청군에게 각개 격파되거나 진격이 저지되어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11일에 그때까지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던 청군은 병력을 재배치하여 산성에 대한 외부의 지원을 보다 확고히 차단하였다. 아울러 서문과 북문 앞에 병력을 집중시켜 무력시위를 벌였다. 오랫동안 고립된 조선측의 항복을 촉구하는 행동이었다.
1월 24일 양군은 하루 종일 포격전을 전개하였다. 새벽에 청군은 미라동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검복리 일대로 이동시켜 산성 동문 일대에 대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청군의 포격으로 동문 문루 일각과 성벽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조선군 역시 천자포를 이용하여 청군 포대를 공격하였고 조선군의 대응포격을 견디지 못한 청군은 병력을 철수시켰다. 저녁이 되자 청군은 다시 동문 밖에 진출하여 홍이포 7,8문을 거치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홍이포는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하여 동문과 남문 일대의 성벽 여러 곳이 파손되었고 성내의 사창과 행궁까지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도 이에 대응하여 화포 사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청군 포대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청군 화약더미에 명중탄을 작렬시키자 청군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접근전이나 포격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1월 26일에 청군은 자신들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그곳에 피난한 비빈과 왕자, 종실, 신료의 가족 등을 포로로 잡았음을 조선측에 알리고 출성항복을 촉구하였다. 출성항복 여부를 두고 성안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청군은 포위망을 강화하고 공성기구를 배치한 채 28일까지 여전히 포격만을 가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악화되어 가자 조선의 조정은 최후까지 항전하려던 방침을 포기하고 국왕의 출성항복을 결정하였으며 이를 청군 진영에 통고하였다.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45일간에 걸친 남한산성의 전투는 종식되었다.
2월 23일 인조는 조정에서 척화파를 대표하던 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ㆍ홍익한(洪翼漢)을 청나라 진영으로 보냈다. 그리고 2월 24일에는 세자를 비롯한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서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인 삼전도(三田渡) 나루로 가서 홍타이지에게 신하의 예를 하며 항복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2월 26일 홍타이지는 먼저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3월 4일 항복 조건에 따라 소현세자 이왕과 봉림대군 이호가 인질이 되어 도르곤을 따라 청나라로 향했다.
남한산성 전투는 방어전에 유리한 지형을 택하였으나 외부의 성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고립된 처지에 내외 연계작전을 펼 수가 없었고 식량부족과 전의 상실로 말미암아 끝까지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한 전투였다.
< 인조실록 >에 기록 된 남한산성 45일간의 기록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체부에 하교하여 산성에 들어온 수령을 기록하게 하다
- 헌부의 건의로 도원수·부원수 의 죄를 용서하다
- 가짜 왕제와 대신을 보낸 것이 탄로나 박난영이 오랑캐에게 죽임을 당하다
- 안치되거나 귀향간 자를 평산에 정배하게 하고 유생을 풀어 주게 하다
- 성첩을 순시하고 사졸을 위로하다
- 원두표를 어영 부사로 삼다
- 납서로 제도의 군사를 부르고 도원수·부원수 에게 들어와 구원하게 하다
- 유성이 나타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홍서봉이 오랑캐 장수에게 재배하다
- 대신을 인견하고 사태를 의논하다
- 예조 판서 김상헌이 화의의 부당함을 극언하다
- 김류·홍서봉·김신국 등이 청대하고 세자의 인질문제를 논의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김상헌·장유·윤휘를 비국 당상으로 삼다
- 민진익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이찬조는 추증하다
- 전 참봉 심광수가 최명길을 베길 청하다. 하교하여 전승의 결의를 다지다
- 병사들을 승진시켜 위로하다
- 내주방의 은그릇을 해조로 보내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성을 순시하다
- 성내 주민을 복호하게 하고 수고한 자를 논상하게 하다
- 납서로 강도유수·검찰사 등에게 유시하여 빨리 구원하게 하다
- 적병의 진격을 격퇴하다. 성을 순시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사신이 와서 한이 송경에 도착했다고 하다. 납서를 도원수 등에게 보내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초관 이시민이 심기원의 장계를 가져오다
- 충청도 원병이 헌릉안에 도착하다
- 승려 삼인이 소와 말을 바치니 호궤하게 하다
- 마부달 등이 성밖에 도착하다. 심열이 강화문제로 차차를 올리다
- 김신국·이경직 등이 적진에서 돌아오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김류에게 결전할 것을 명하다
- 삼사가 주화자를 참할 것을 청하려다 대사간 김반 등에 의해 그만두다
- 자모군을 호궤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내전으로 옮기다
- 정원이 내일 망궐례 행하기를 청하다
- 성을 순시하고 호궤하다
- 전사가 포획한 물건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도록 하교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망궐례를 행하다
- 승려 경운이 강도에서 돌아오다
- 한흥사 승려 희안이 백지와 산채 등을 바치다
- 출전한 군사들에게 상을 내리다
-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향을 사르고 사배하고 기도하다
- 김류의 건의로 충청 병사에게 적의 형세를 알려주게 하다
- 승려 호열이 청밀을 바치다
- 성에 들어온 체부의 군관 임몽득에게 직책을 제수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계시다
- 예조가 온조에게 제사지낼 것을 아뢰다
- 군사를 호궤하다
- 사간원의 청으로 공청 병사 이의배에게 속히 진군하도록 하다
- 호군하던 중 윤지원에게 우장으로 가하다
- 사영 대장 신경진 등이 청대하고 한 번 싸울 것을 허락받다
- 이경증이 아뢰어 이수림·오영발 등을 논상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삼공·비국 당상과 의논하여 적진에 술과 소를 보내기로 하다
-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검단산에 도착했으나 적의 습격으로 패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이기남이 소와 술을 가지고 갔으나 노장이 받지 않다
- 어공을 후하게 하지 말라고 하교하다
- 공청 감사 정세규가 험천에 진을 쳤으나 전군이 패몰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완천군 최래길이 기신의 계략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 최명길의 건의로 적진에 익위 허한을 보내어 강화를 논의하게 하다
- 남병사 서우신과 군관 이이립에게 6품직을 제수하다
- 민진익이 제도에 명을 전한 뒤 돌아오자 포상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유도 대장 심기원이 승전했다고 납서로 아뢰다
- 김류의 지휘로 북문 밖에 진을 친 군대가 크게 패하다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김신국 등을 사자로 보내기로 하고 심기원을 제도의 원수로 삼다
- 예조 판서 김상헌이 사자 문제와 강도유수 장신에 대해 아뢰다
- 간원이 사자보내지 말 것과 이의배 등을 처벌을 청하다
- 강도의 서리 한여종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오다
이전 인조 14년 11월
다음 인조실록34권, 인조 15년 1월
-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 망궐례를 행하다
-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
- 비국 낭청 위산보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오랑캐의 진영에 갔다 오다
- 일식이 있다
- 삶은 고기와 찐 콩을 장졸에게 내리다
- 대신과 비국의 신하를 인견하고 오랑캐에게 보낼 문서에 대해 의논하다
- 귀순하라는 내용의 황제의 글과 그에 대한 의논
- 완풍 부원군 이서의 졸기
- 동양위 신익성이 오랑캐의 글을 태울 것을 상소하다
- 도원수 김자점의 군관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오다
- 홍서봉 등이 오랑캐 진영에 가지고 간 국서
- 홍서봉이 오랑캐에게 상을 ’신하’라 일컫을 것을 아뢰다
- 봉교 이지항 등이 청대하고 회답하지 말 것을 청하다
- 황하도 감찰사 이배원 등의 장계가 들어오다
- 척화와 강화의 의논이 있다. 김자점과 심기원을 각각 원수로 삼다
- 사간 이명웅 등이 최명길을 죄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 협수사 기평군 유백증이 김류와 이방을 주벌할 것을 상소하고는 파직되다
- 늙고 병든 신하에게 찬물을 내리게 하다
- 선전관 민진익이 조정의 명을 전하러 나갔으나 실패하다
- 남병사 서우신과 함경 감사 민성휘의 장계가 들어오다
- 탈영병을 효시한 김사호를 승진시키다
- 전라 병사 김준룡이 치계하여 승전 소식을 전하다
- 강원 감사 조정호가 장계하여 전투 상황을 전하다
- 함경 감사 민성휘의 군사가 강원도 금화현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오다
- 사방에 운무가 끼다
- 도승지 정광경이 상소하여 체직되고 이경직을 후임으로 삼다
- 중관을 보내어 장졸을 위로하다
- 서흔남과 승려 두청이 도원수 김자점 등의 장계를 가지고 오다
- 대신을 인견하고 구원병, 강화, 군량의 문제에 대해 하문하다
- 예조가 온조왕의 제사를 다시 지낼 것을 청하다
- 김류·홍서봉·최명길 등이 청대하고 국서 보낼 것을 윤허 받다
- 예조 판서 김상헌이 청대하고 사신 보내는 것에 반대하다
- 대사간 김반과 집의 채유후 등이 청대하고 사신파견의 불가함을 진달하다
- 원종 대왕의 영정에 제사하다
- 지평 염우혁과 헌납 김경여가 사신 보내지 말 것을 청하다
- 김류·홍서봉·최명길 등이 청대하고 수정한 국서
- 이의정 이홍주와 호조 판서 김신국 등이 국서 대신 말로 물어보길 청하다
- 창백색 구름 한 가닥이 일어나다
- 홍서봉의 건의로 정명수와 용골대·마부대에게 은을 주게 하다
- 성을 순시하다가 장졸을 위로하다
-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을 보내 국서를 전하다
- 동풍이 크게 불고, 헌릉에 불이 나다
- 동부승지 이경승의 청으로 군사의 노고를 보상해 주게 하다
- 성첩을 지키는 군사 중 원하는 자에게 직책을 제수하도록 명하다
- 얼어 죽은 군졸이 나오다
- 도원수 심기원이 장계를 보내, 구원병들이 대부분 패했다고 하다
- 최명길과 윤휘가 청대하여 내일 노진에 사람 보낼 것을 아뢰다
- 의승 두청이 유지를 가지고 나가다
- 본부가 약반을 양전에 바치다
- 오랑캐가 ‘초항’이란 글자를 성 중에 보이다
- 무조건 항복하라는 요구에 대해 의논하였으나 사책에는 쓰지 못하게 하다
- 호군 민형남이 모든 계책을 굳게 결정하여 동요함이 없기를 상소하다
- 오랑캐가 황제의 글을 보냈는데 ‘조선 국왕에게 조유한다’고 하다
- 정언 이시우가 군사 기율과 수령 임명에 대해 아뢰고 이에 비국이 회계하다
- 이민구를 경기 우도 관찰사로 삼다
- 예조 판서 김상헌이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고 주벌을 청하다
- 삼사 이식 등이 청대하여 국서를 내일 보낼 것을 청하자 최명길이 꾸짖다
- 국서를 받지 않아 도로 가져와 ’폐하’라는 두 글자를 더하다
- 이조 참판 정온이 화친을 배척한 죄로 대죄하다
- 눈이 크게 오다
- 오랑캐의 사신 요구로 우상 이홍주·최명길·윤휘가 가다
-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다
- 이조 참판 정온의 최명길이 나라를 팔아 넘겼다는 내용의 차자
- 오랑캐가 사신을 독촉하다
- 대사헌 김수현 등이 ‘신하’란 글자에 대해 진달하니 영의정에게 하문하다
- 오랑캐가 답서를 보내어 화친을 배격한 신하를 묶어 보내라 하다
- 이홍주 등을 통해 보낸 국서
- 도승지 이경직이 부득이한 조치를 종친과 문무 백관에게 고유하길 청하다
- 최명길이 국왕이 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오랑캐의 말을 아뢰다
- 용골대가 급히 사신을 청하다
- 용골대가 국서를 되돌려 주다
- 사간 이명웅이 청대하여 자신을 묶어 보낼 것을 청하다
- 김수현 등이 결전의 내용의 글을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 김류·이성구·최명길이 입대하여 신하를 묶어 보내는 것에 대해 아뢰다
- 삼사가 청대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 정부가 화친을 배척한 자에게 자수하도록 하다
- 세자가 성을 나가겠다는 내용의 봉서를 비국에 내리다
- 이조 참판 정온이 차자하여 자신을 묶어 보내길 청하다
-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 강도 함락 시,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과 전 우승지 홍명형 등의 졸기
- 예조 판서 김상헌이 죽게 해 줄 것을 청하다
- 세자를 오랑캐 진영에 나가게 하도록 영을 내렸으나 묘당이 수행하지 않다
- 수원의 장관들이 화친 배척한 신하 내보내도록 청하다
- 서성과 동성을 습격한 적을 패퇴시키다
- 도체부가 무과 베풀길 청하자 허락하다
- 집의 채유후와 사간 이명웅, 장령 황일호 등이 세자의 출성에 대해 아뢰다
- 부사과 윤문거가 아비 대신 성을 나갈 것을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 전 교리 윤집과 전 수찬 오달제가 상소하여 오랑캐에게 가서 죽을 것을 청하다
- 부호군 윤황이 오랑캐에게 가서 죽을 것을 청하다
- 우윤 김대덕이 상소하여 신하를 결박하여 보내는 의논의 정지를 청하다
- 화친 배척한 신하를 내보내겠다는 국서
- 시강원 설서 유계의 적극 싸울 것을 청한 상소문
-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 적이 사신을 독촉하자 이홍주 등이 국서를 전달하고 오다
- 대사헌 김수현 등이 차자를 올려 묘당의 의논을 개정하도록 청하다
-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지다
-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을 청하고는 그 동안의 국서를 모두 돌려주다
- 훈련 도감과 어영청의 장졸이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오랑캐에게 보낼 것을 청하다
- 강도의 함락 보고를 처음 듣다
- 홍서봉·최명길 등이 강도의 함락을 아뢰다
- 대신 및 최명길이 청대하자 내일 성을 나가기로 결정하다
- 삼사가 청대하여 성을 나가지 말 것을 아뢰다
- 부제학 이경석 등이 세자는 성에 머물 것을 청하다
- 황제의 약속을 확인하려는 국서
- 예조 판서 김상헌이 출사하지 않자 장유에게 대신하게 하다
- 김수현이 차자를 올려 해직을 청하자 윤허하다
- 삼공이 청대하여 세자의 출성 여부와 결박해 보낼 신하의 수를 아뢰다
- 용골대가 한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 문서를 모아 태우다
- 이조 참판 정온과 예조 판서 김상헌이 자결 시도와 사론
-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의 졸기
- 윤집·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다
- 이성구·신경진·한여직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이조 참판 정온의 차자
-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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