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일화1 시호를 잘못 정했다가 교수형을 당할 뻔하다 조선 시대에는 재상이나 유명한 유학자들이 죽으면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시호를 내려 주었다. 시호는 한 인물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내포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었으나, 점차 대상이 확대되어 고명한 유학자들에게도 시호를 내렸다. 대체로 문신이나 학자는 문文, 무신은 무武, 전쟁 등에서 공을 세운 무방은 충忠자가 앞에 붙여졌다. 조선 초기에는 대개 봉상시에서 주관하여 시호를 정한 다음 임금에게 올려 재가를 받도록 했다. 시호를 결정하는 일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직후에 시호를 잘못 정했다가 봉상시의 관원이 교수형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태조 5년 7월에 개국 공신 정희계가 죽자 시호를 정하는 문제로 임금.. 2020. 8. 13.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