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고창읍성의 해자 – 밤마다 들려오는 ‘진휼청의 울음’

by 무님 2025. 6. 10.
728x90

전북 고창.
고요한 성벽이 마을을 감싸 안은 듯한 이 읍성은,
낮에는 평화롭고 정겨운 풍경으로 여행자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해가 지고 조용한 밤이 되면

이 성곽 아래 해자(垓子) 주변에선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떠돕니다.

그것도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상하게도, 그 울음은 늘 같은 자리를 맴돌고,
멈춘 적도, 사라진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고창읍성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조선 후기 진휼청의 비극과 울음의 정체를 함께 따라가보겠습니다.

 

고창 읍성 전경

 

고창읍성 – 전쟁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막기 위해 만든 성?

 

고창읍성은 1453년(단종 1년),
외침 방어와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축조된 대표적인 평지 읍성입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이 성은
전쟁보다 더 무서웠던 적, 바로 ‘역병’과의 전쟁터가 되죠.

 

17~19세기 고창 일대는 기후 이상과 기근, 그리고 역병이 빈발

이에 따라 읍성 내에는 <진휼청(賑恤廳)>이 설치되어
굶주린 백성과 병든 이들을 수용하고, 약을 나누는 장소로 기능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진휼청이 세워졌던 곳이 바로 지금의 해자와 맞닿은 구역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창 진휼청

 

진휼청, 구원을 주던 곳인가 고통의 끝인가

 

 

‘진휼(賑恤)’이란,
재난이나 기근 등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조선식 복지 제도입니다.
진휼청은 말 그대로 쌀과 약, 임시 거처를 제공하던 곳이었죠.

하지만 고창의 경우,
진휼청의 인력 부족, 약제 고갈, 그리고 감염 확산으로 인한 격리 실패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중 일부는 기록조차 되지 못했고,
시신은 해자 근처 임시 매장되었다는 구전이 남아 있죠.

 

이후, 해자 근처를 지나면

밤마다 여성과 아이의 흐느낌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고창 읍내에선 조용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성음성 야경

 

 민간 설화 vs 역사 기록 – 울음의 정체는?

 

고창읍성 해자의 울음에 대한 전설은 주로 세 가지 버전으로 전해집니다.

 

역병에 걸린 어머니가 아이를 진휼청 문 앞에 두고 사라졌다는 이야기

격리 수용 중 죽은 사람들 중 일부가 신원 미상 상태로 해자 근처에 묻혔다는 민간전승

진휼청 내부의 작은 우물에서 들려오던 이상한 소리가 해자로 퍼졌다는 구술자료

이 설화들은 그 자체로 기묘하지만,
놀랍게도 고창군 향토지, 조선 후기 지방관의 장계(장부 보고서) 일부에는
‘해자 구역 인근 매장’, ‘진휼소 관리 문제’, ‘민심 불안 보고’ 등이 실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
실제 재난 기록과 접점이 있는 역사적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해자는 성벽이 아니라, 침묵하는 무덤일지도 모른다

 

고창읍성의 해자는
본래는 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시설이었지만,
어쩌면 조선 후기의 그 절망적인 시간 동안
'사람을 막은 것이 아니라, 생을 잃은 이들을 품은 ‘조용한 무덤' 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과 외침은 해자의 물결 속에 스며들어,
지금도 밤마다 우리의 귓가에 닿고 있는지도요.

 

다음에 고창읍성을 찾는다면 해자 옆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마세요.

 

그 물가에 잠시 멈춰 서서, 그곳을 지나간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