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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선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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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인걸 - 조선전기 『휴암집』을 저술한 학자이며 문신이다.

본관은 수원(). 자는 사위(), 호는 휴암(). 서울에 거주하였다. 사헌부지평() 백효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교() 백사수()이고, 아버지는 왕자사부() 백익견()이다. 어머니는 사직() 우종은()의 딸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김안국()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송인수()·유희춘()·이이()·성혼() 등 당대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김식()이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존경해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해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 때 예문관 관리가 이조()의 인사 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하던 옛 관습을 복구해 실행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 학당()을 세우고 학장()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쓴 공로로 품계가 높아졌다. 1541년에는 홍문록(: 홍문관의 수찬·교리 등을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추천 기록)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지평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다.

같은 해 명종 즉위 뒤 윤원형() 등이 대비인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유관() 등을 제거할 때, 사간원헌납()으로 있으면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최보한()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그 뒤 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난하는 양재()의 벽서를 기화로 소윤() 세력이 대윤()의 잔존 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 안변()에 유배당하였다. 1551년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간 뒤, 『태극도설()』과 정주학()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1565년(명종 20)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교리()로 등용, 이듬해 사도시첨정()·선공감부정()을 지냈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등의 치적을 쌓아 고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선조가 즉위한 뒤 1568년(선조 1) 기대승()의 건의로 특별히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공조참의·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 밖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68년에는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오래지 않아 철렴(: 수렴청정을 그만둠)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망할 때까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그러나 선조가 아버지 덕흥군()을 추존하는 작업을 추진할 때 일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와는 달리 임금의 처지를 두둔해 사림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조정에 분당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준경()의 의견을 좇아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비들을 해하려 한다는 사림의 의심을 받아 1571년 파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우참찬으로 징소되었으나 치도()를 논하는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에는 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이이()와 함께 다시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서인(西)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 밖에도 국경의 상황을 논하고 군비를 닦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정에 대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동지춘추관사()로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선조 초에는 많은 정치적 문제에 연관되었고 매우 연만해 많은 시간을 파주에 퇴거해 있었다. 이에 선조는 대사헌·우참찬 등의 관직을 내려 부르거나 식량을 내리기도 하고, 1569년의 경우와 같이 직접 편지를 보내 부르는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기도 하였다.

나이가 든 뒤에도 성리학에 대한 탐구를 열심히 했으며 이이·성혼()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였다. 기묘사화 뒤 명종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1545년 을사사화 때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선조 때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파주의 파산서원()과 남평()의 봉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휴암집()』이 전한다. 인조 때 충숙()의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경()으로 고쳐졌다.

 

백인걸 간찰

 

 

2. 성혼 - 조선시대 『우계집』, 『주문지결』, 『위학지방』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 호는 묵암()·우계(). 현령 성충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성세순()이고, 아버지는 현감 성수침()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판관 윤사원()의 딸이다. 서울순화방(: 지금의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진사의 양장()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 해 겨울 백인걸()의 문하에서 『상서()』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와 사귀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이황()을 뵙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1568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殿)·장원서장원()·적성현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서실의()」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했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을 논하였다.

즉, 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이황의 이기호발설()에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중용()』 서()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1573년 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 해 12월에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모두 사임하였다.

1575년 6월에 다시 지평으로 불러 상경했으나 병으로 사체(: 사양하여 임명이 보류됨)하니 선조는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조좌랑·사헌부지평 등을 제수했으나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가니 선조는 체임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예빈시판관·장흥고주부·종묘서령·광흥창주부·사헌부장령·장악원첨정()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은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 해 2월 사정전(殿)에 등대(: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장령에서 내섬시첨정()으로 전직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법()과 공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을 역설하되 혁폐도감()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성혼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귀향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녹봉을 거부하면 미숙(: 식량)을 하사하면서까지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어 내섬시첨정·풍저창수()를 역임하면서 선정전(殿)에 등대했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충무위사직()에 제수되었다. 성혼은 경연석상 또는 상소로 계속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도리어 겨울용 신탄(: 땔감의 하나)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에 승진되었다. 그 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에는 다시 사헌부집의()·사옹원정()·사재감정() 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에 가자하여 병조참지()로,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성혼의 관계 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 후 이이가 죽자 사양하면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를 맡았다. 그 해 7월에 파산()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 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자신을 공격했으므로 자핵상소(: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하였다. 1587년에는 자지문(: 자신이 죽은 뒤에 성명이나 행적 등을 밝힌 글)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성혼은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의 최영경()이 억울하게 죽자 동인의 화살이 성혼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실 성혼은 정철()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1590년에는 양민()·보방()·율탐()·진현()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1591년에 『율곡집()』을 평정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성문준()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으로서 부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이천()·연천()·삭녕()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였다.

이 후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하면서 불러들여 전삭녕부사 김궤()의 의병군중()에서 군무를 도왔다.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 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성혼이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성혼은 의주의 행조()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편의시무9조(便)」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했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곁에서 호위하였다.

1594년 석담정사()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 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성혼은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또 허화완병(: 군사적인 대치 상태를 풀어 강화함)을 건의한 이정암()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성혼은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 나이가 많은 관원이 사직을 원하는 소)를 올린 후, 그 길로 사직하고 연안의 각산()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정사조()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 『우계집()』 6권 6책과 『주문지결()』 1권 1책, 『위학지방()』 1책이 있다.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 관작이 회복되고 제향의 허락이 내려짐)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 배향에서 삭출됨)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의 죽림서원(), 창녕의 물계서원(), 해주의 소현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파주의 파산서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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