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정조 13년 7월 영조의 부마인 금성위 박명원이 양주으 배봉산 기슭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다녀와서 상소을 올렸다.
"뱀 등이 묘지 가까운 곳에 똬리를 틀고 망주석은 쓰러져 있고 봉분에는 억새불이 돋아 처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박명원 상소문을 읽은 정조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왕의 아버지의 묘가 이 지경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그날의 기록 < 조선왕조실록 >
정조는 조정의 대신들을 희정당에 불러 승지로 하여금 박명원의 상소를 대신 읽게 하였다. 그러자 대신들은 정조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정조는 아버지 묘를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그 장소는 수원부의 관청 뒤쪽으로 정하고 서유방을 경기관찰사로, 조심태극 수원부사에 임명하여 이장에 대한 일을 맡겼다.
사도세자의 이장은 신속하게 처리되어 3개월 뒤인 10월 공사가 마무리 되어 이장했으며, 묘는 영우원에서 현릉원으로 이름을 고쳤고, 묘소 옆에 용주사를 세웠다.
사도세자가 묻히 형릉원은 수원부의 읍내로 이곳에 백성들이 살고 있었고 때문에 수원 팔달산 아래로 수원부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정조는 이곳을 새로운 도시로 만들기 위해 1794년부터 34개월 동안 공사를 벌여 1797년 10우러 16일 마침내 낙성식을 가졌다.
현륭원(顯隆園)은 신도시 화성을 탄생시킨 으뜸 요인으로, 정조의 지극한 효성으로 새로이 천장(遷葬)한 사도세자의 무덤을 말한다. 현륭원의 주산(主山)은 화산(花山)으로, 구 수원읍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원래 무덤은 한양의 동쪽 양주 배봉산(拜峰山) 자락, 현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 있던 영우원(永祐園)이었는데, 풍수지리상으로 자리가 좋지 않다하여 명당인 수원부 뒷산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이 때에 현륭원으로 개칭되었다가, 광무3년(1899)에는 융릉(隆陵)으로 격상된 것이다. 융릉은 건설당시 구 수원읍의 관청 바로 뒤에 자리 잡아 관청 건물을 왕릉의 부속시설로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을의 중심부인 관청가에 무덤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수원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만 했고, 이로써 신도시 화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친부(親父)의 묘를 옮기고 신도시 화성을 건설한 정조는 1800년에 숨을 거두었고, 뒤이어 즉위한 순조는 정조의 묘호(廟號)를 건릉(健陵)으로 정하고 구 수원읍의 강무당(講武堂)터에 위치를 잡았다. 그러나 풍수상 좋지 않다는 이견과 봉분 위의 사초(莎草)가 무너지는 등의 좋지 않은 일로 인해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순조21년(1821)에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皇后)가 죽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합장하게 되었다. 이곳은 구 수원읍의 향교가 있던 자리였으나, 건릉이 위치함으로써 융릉과 함께 선왕이 모셔진 중요한 전배장소가 되었다. 현재에는 융릉과 건릉을 합하여 융건릉이라 통칭하고 사적 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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