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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탄압 < 신유사옥 >

by 무님 2020.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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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사옥은 조선 순조 원년(1801)인 신유년에 있었던 가톨릭교 박해 사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전교하던 이승훈()을 비롯하여 이가환, 정약종, 권철신, 홍교만() 등의 남인()에 속한 신자와 중국인 신부 주문모 등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 왕후()를 배경으로 하는 벽파가 시파와 남인을 탄압하려는 술책에서 나왔다.

 

 

 

 

순조는 1790년 6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수빈 박 씨, 이름은 공, 자는 공보, 호는 순재이다. 수조는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 태어난 문효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1800년 정월 세자에 책봉되었고, 이 해 6월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1세로 왕위에 올랐다.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가 어렸기 때문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 정순왕후는 김귀주의 누이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조 16년 영남의 남인들이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였을 때 그들의 상소에 동조한 서유린을 비롯하여 김 이익, 김이재, 박제가 등을 유배시키는 한편 홍국영, 심이지 등의 관작이 추탈 당했으며 정조를 도왔던 김관주, 심환지 등을 등용하였다.

조정에서 정조의 세력을 몰아낸 정순왕후는 화살을 천주교로 돌려 전국의 감사와 수령들에게 천주교도들을 색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천주교는 정조 8년인 1784년 3월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귀 나라 안에 급속하게 퍼졌다. 1785년 천주교도들의 순교자가 발생하였으나 드들은 계속 교세를 넓히면서 중국의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여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였다. 천주교는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조정의 남인들에게 전ㄴ파되어 이승훈, 이벽, 권철신, 이가환, 정약용 등은 천주교에 심취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조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천주교도들을 탄압하고 아울러 천주교에 관련된 남인들을 없애려고 했다. 이때 천주교도들을 잡기 위해 오가작통법을 썼다. 오가작통법은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 서로 범법행위가 일어나는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일종의 치안유지를 위해 생긴 것으로 정순왕후는 이 오가작통법을 이용하여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였다.

전국에 걸쳐 대대적인 천주교도 색출령이 내리자 수많은 신도들은 물론 핵심세력인 권철신, 이가환, 정약전, 정약용, 정익종, 이승훈 등이 검거되었다.

권철신, 이가환은 국문을 받다가 참혹한 고문으로 죽었고, 정약용은 장기현으로,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500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있었다. 이 사건을 ' 신유사옥'이라 일컫는다.

 

이때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자수하였는데 조선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강화도에 유배된 은언군 인의 아내와 며느리가 그와 만난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을 모두 사사하였다. 그 뒤 황사영의 백서가 발각되었다. 그 백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 황제가 조선의 왕에게 명령하여 서양인과의 교제를 허용하도록 할 거

안주를 청나라에 편입시켜 감독하게 할 것

서양의 선박 수백 척을 동원하여 정병 5~6만 명을 조선에 보내 조선으로 하여금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보장할 것

등이었다. '

 

이 백서를 비단에 적어 중국의 북경에 보내려고 하였다  황사영은 곧장 처형되었고, 그 위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를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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