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안산군지사 때 방원을 도와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웠다. 박포, 조사의 반란을 진압했다. 병조판서,좌참찬·찬성 등을 지내고 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공이 큰 것에 자만, 탄핵 받아 유배되었다.《용비어천가》편찬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이경이고 어머니는 영양남씨로 남휘주의 딸이다. 본래 윤공의 부인이었던 어머니 남씨는 남편 사후 두 아들 윤자량과 윤자당을 데리고 이경에게 개가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 한다. 본관 안성(安城). 아버지는 경(坰).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했다. 1398년 안산군지사(安山郡知事)로 있을 때 방원(芳遠:뒤에 태종)을 도와 경복궁에 병력을 출동시켜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 등을 제거하는 등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으며,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인 1390년 생원시에 합격 후 조선 태조 때인 1393년(태조 2) 식년문과에 병과 급제, 그 뒤 정안대군의 심복이 되었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1398년에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가 되었다. 지안산군사로 재직 당시 정안대군 방원(芳遠, 훗날의 태종)을 도와 사병을 동원, 경복궁 주변에 병력을 출동시켜 한성부를 점령, 세자 방석(芳碩) 그 형 방번을 제거하고,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 방원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방원에게 “공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을 뿐이다.”라고까지 말했다 한다. 이는 당시에는 태종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지만 태종은 후일 이 말을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그를 경계했다 한다.
1398년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安城君)에 봉군되었으며, 승정원 우부대언에 임명되었다.
1399년(정종 1) 좌부승지가 되고, 이듬 해 초 박포(朴苞)가 방원과 반목하던 방간(芳幹)을 충동해 거병하자 하륜 등과 함께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제거하였고 박포를 처형하였다. 이어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고, 하윤과 함께 정종에게 양위를 요구하였다. 정안대군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새로 설치한 내갑사(內甲士)의 좌번(左番) 담당 책임자가 되었다가,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말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등이 친이성계파 인사들과 함께 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도진무(都鎭撫)가 되어 좌도도통사와 함께 출정, 이들을 진압하고 돌아왔다. 이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고, 1405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그 해의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다. 문신임에도 궁술과 기마, 창던지기 등에 능하였으므로 그 뒤 무관직을 계속 역임하였다.
1406년 겸중군총제(兼中軍摠制)·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고, 1407년 겸충좌시위사상호군(兼忠佐侍衛司上護軍)·겸의흥시위사상호군(兼義興侍衛司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408년 십사상호군(十司上護軍)이 폐지되면서 겸중군도총제(兼中軍都摠制)가 되고, 이듬해 동북면절제사가 되었다. 이어 참찬의정부사·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거쳐, 1412년 말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13년 병조판서를 거쳐 1414년초 의정부찬성사가 되었는데, 뒤에 의정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1414년 초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좌참찬을 거쳐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 한편, 1414년 지춘추관사로서 영춘추관사 하륜(河崙) 등과 함께 《고려사》의 일부 내용 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일부 고쳐서 바로잡도록 명을 받았다.
1415년(태종 15년)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다시 좌찬성에 임명되고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공이 워낙 큰 것에 자만하고 다니다가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태종은 바로 그를 유배형에 처한다. 1416년(태종 16) 왕이 가뭄을 걱정하고 여러 대신들이 날마다 재앙을 의논하며 몸 둘 바를 모르고 분주하였으나, 이숙번이 병을 이유로 여러 달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다.
태종은 이숙번이 대궐에 출입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고, 때를 같이하여 이숙번의 무례(無禮)와 불충(不忠)을 고하는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태종은 이 같은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며 진노하였다. 또한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죽음 이후 세자(世子, 양녕대군)를 자주 뵐 것을 청하는 것은 역모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후 양사로부터 원래 성품이 망령된데다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를 믿고 거만방자하고 동료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아, 이숙번은 사직 상소를 올렸고, 자신의 별장이 있는 황해도 연안에 가서 살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종은 이숙번의 희망대로 가서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벌이 가볍다는 반발에 부딪히자 결국 관작을 삭탈당하고 이숙번의 공신녹권과 직첩은 모두 회수되었으며 1417년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를 짓게 되자 승정원도승지 김돈(金墩)의 천거로 개국 초의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다 하여 서울에 불려와서 편찬에 참여한 뒤 편찬이 끝나자 함양 유배에서는 풀려나 경기도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허락받았다. 하지만 정계 복귀는 하지 못했고 1440년(세종 22년)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금화로 353에 있다. 물왕저수지 근처의 이숙번 묘는 2006년 12월 5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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