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2 효종에서 숙종으로 < 북벌론 > 조선의 군사력을 길러 청을 정벌하자는 주장이다. 효종 때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계획으로 마련되어 숙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청이 중국 대륙을 완전히 통일하면서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계획이었지만 조선의 국방을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게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럭저럭 전쟁 준비를 하긴 했으나(이는 실록에서도 꽤 보인다.)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규모의 일본군에게 개전 초 일방적으로 몰린 조선은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업고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에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에 명나라는 연인원 20만 이상을 병력으로, 은화 900만 냥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하여 조선을 지원하였는데, 이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조선에 끼치는 정치적 입김은 더욱 강.. 2020. 6. 12. 인조시대 관련 인물 - 대동법 시행한 김육 김육은 조선 중기 형조참의, 병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실학자이다. 17세기 후반의 공납제도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였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김비(金棐)이고,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김육은 1580년 7월 14일 한양(옛 서울) 마포에 있는 외조부 조신창(趙新昌)의 집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혹은 회정당(晦靜堂)이다. 김육은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외우는 비상한 자질를 타고난 아이였다. 1588년 조부인 김비(金棐)가 강동 고을 수령이 되자 부친.. 2020. 5. 25.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