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2 일본군 경복궁을 점령하다 - 전쟁의 서막 < 청. 일 전쟁 >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6월 2일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 2020. 11. 22. 외세를 몰아내고 내 나라를 지켜라 <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 > 조선 조정은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이용태를 파견했으나 이 인선이 대실패였다. 이용태는 조정에서 백성을 달래고자 내려보냈던 안핵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다 난리를 일으키는 동학 교도들의 잘못이다."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조정과 동학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동학 교도들을 체포하거나 재산을 빼앗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그냥 데모 수준을 넘어 유혈 사태로 번진 민란이었던 만큼 정부는 슬쩍 넘기기 쉽지 않았던 사태였긴 했지만, 하다못해 일반적인 민란의 뒤처리 수준 정도로만 일을 처리했더라도 대책 없이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이용태의 행위에 고부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전봉준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형.. 2020. 11. 14.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