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정은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이용태를 파견했으나 이 인선이 대실패였다. 이용태는 조정에서 백성을 달래고자 내려보냈던 안핵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다 난리를 일으키는 동학 교도들의 잘못이다."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조정과 동학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동학 교도들을 체포하거나 재산을 빼앗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그냥 데모 수준을 넘어 유혈 사태로 번진 민란이었던 만큼 정부는 슬쩍 넘기기 쉽지 않았던 사태였긴 했지만, 하다못해 일반적인 민란의 뒤처리 수준 정도로만 일을 처리했더라도 대책 없이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이용태의 행위에 고부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전봉준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형인 태인 접주 김개남과 고부 민란 때 포섭에 실패했던 무장 접주 손화중을 포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1차 동학 농민 봉기이다.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민간에 포고하여 이번의 거사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음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이름으로 된 ‘무장동학포고문’으로도 불리는 이 창의문에서 과감히 봉기할 것을 요청하자 근방의 10여 읍에서 이에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
전봉준은 같은 해 4월 말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김개남과 모의하여 고부 백산(白山)에 집결시켰다. 여기서 항전의 대오를 갖추게 된 후 전봉준이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總管領)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전봉준은 우선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인 ①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③ 일본오랑캐를 내쫓아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權貴)를 모두 죽일 것 등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창의의 뜻을 밝히는 또 다른 격문을 작성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무장·백산에서의 봉기는 지역적인 민란의 성격을 지양하고 이제는 반침략·반봉건을 지향하는 외세와 집권층에 대한 도전이며 개혁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5월에 들어서면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부안관아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과 초군(哨軍) 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별초군 250명과 보부상으로 편성된 관군을 이끌고 부안 방면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관군은 5월 10일에서 11일 새벽에 걸쳐 도교산(道橋山)에 근거를 둔 동학농민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황토현싸움에서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으로 진격하여 이를 점거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의 보고에 의하여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알게 된 정부는 5월 6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경군을 보내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현지로 출동하게 하였다.
홍계훈은 장위영병(壯衛營兵) 약 800명을 3개 대대로 나누어 해로를 통하여 전라도 군산포에 이르렀다. 그러나 5월 11일 전주에 입성한 경군은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도망자가 속출함으로써 병력이 반감되어 있었다.
이 병력으로써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한 초토사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의 파견을 요청하는 동시에 청군차용(淸軍借用)도 아울러 주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증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5월 19일 장위영병 300명과 강화병(江華兵) 500명을 증파하였다.
총제영중군(總制營中軍) 황헌주(黃憲周)가 증원군을 이끌고 인천을 떠나 영광 법성포(法聖浦)에 이르렀을 무렵, 동학농민군은 이미 영광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한편 왕은 5월 23일 직접 전라도민에게 윤음(綸音)을 내려 불법 지방관의 징계를 약속하고 실제로 민폐가 되는 것은 여론에 따라 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또한 위협에 못 이겨 가담한 사람은 아무 벌도 주지 않을 것을 약속하여 난도(亂徒)로 하여금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타이르는 선무책을 썼다.
전주성 내에서 정세의 추이를 관망하던 홍계훈은 증원군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5월 22일 동학농민군 추격작전에 나서 전주를 출발하여 남진을 시작하였다. 3대(隊)의 경군을 거느리고 정읍·고창을 거쳐 영광에 이르렀으나 동학농민군은 이미 이곳을 떠나 장성 방면으로 이동한 뒤였다.
27일에 이르러 증원군과 합류한 초토사의 경군은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장성 남쪽인 황룡촌(黃龍村)에서 접전을 벌였다. 처음에 이학승(李學承)이 거느리는 경군의 별동대는 동학농민군에 대하여 기습적인 포격을 가하여 사상자 수십 명을 내게 하였으나, 즉시 반격을 받아 패주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으며, 이 여세를 몰아 5월 28일에는 장성을 떠나 북상의 길에 오르고 5월 31일에는 드디어 전주성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황토현에서 패배한 뒤 전주는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어서 전라감사 김문현과 판관 민영승(閔泳昇)은 성내에 남아 있던 군졸과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성문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놀라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다투어 도망치고 말았다.
전주에 무혈 입성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성내를 지키면서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 무렵 정부의 구원요청에 따라 청군이 출동하고, 뒤이어 일본군도 출동해 옴으로써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 남접의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북접의 최시형(崔時亨)은 처음 거사에 반대하고 순수한 종교운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 중진들이 농민운동에 교단을 들어 참여할 것을 권고하게 되자 이를 받아들여 5월 6일에는 교주 최시형의 이름으로 각처의 동학접주에 통문이 띄워졌다.
5월 10일 충청도 청산현(靑山縣) 소사리(小蛇里)에 집결한 동학교도의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고 그들은 곧 행동을 개시하여 공주목과 진잠현(鎭岑縣)의 경계인 성전평(星田坪:儒城郡星田里)을 점거하고 이어서 회덕현을 습격하였다.
충청감사 조병호(趙秉鎬)는 우선 이민(吏民)과 보부상을 초모(招募)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은진 파수병 100명을 급파하는 한편, 충청병사 이용복(李容復)에 청주 영군 200명을 파병해 주도록 연락하고 다시 전주에 머물러 있는 초토사 홍계훈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 동안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지나간 공주·청주 이남의 여러 지방은 거의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이 되었으나 5월 14일에는 공주와 진잠 사이에서 갑자기 해산하고 말았다. 그 까닭은 교주 최시형이 무력으로 봉기하는 것을 꺼린 때문으로 여겨진다.
동학농민군이 전주 입성에 앞서 장성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그들은 폐정개혁을 위한 13개 조목의 요구사항을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제시하여 탐관오리의 배격과 외국상인의 침투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농민들의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봉건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요구는 사태의 진전에 따라 보충되고 또한 수정되어 주장된 것이다.
한편 초토사 홍계훈이 거느린 경군은 동학농민군의 뒤를 따라 6월 1일에는 전주성 밖에 이르러 서로 대치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그 동안 6월 4일과 6월 6일의 두 차례에 걸친 양군의 접전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나와 선제 공격한 출격전이었는데, 이번에는 동학농민측에 큰 피해를 준 패전으로 그쳐 도리어 전의를 상실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토사 홍계훈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한 선무공작에 착수함으로써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고종의 윤음과 자신의 효유문(曉諭文)을 성내의 동학농민군에게 전하고, 탐관오리는 법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하면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원정서(原情書)를 두 차례에 걸쳐 양호순변사 이원회(李元會)에게 제시하였다. 제1차 원정서는 14개 조목으로 되어 있고 제2차 원정서는 24개 조목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그 일부가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이래 여러 차례 제시한 바 있는 개혁요구 조목과 중복되어 있으니, 대체로 탐관오리의 숙청과 개항 이후 나타난 외국상인의 횡포와 국내 특권상인의 배격, 그리고 물가등귀의 원인이 되었던 미곡의 국외유출 방지 등을 주장한 것이었다.
동학농민군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의를 상실한 상황 아래서,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강화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초토사 홍계훈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6월 10일(음력 5월 7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거한 지 10여일 만에 철수하고 모두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봉준은 2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전주와 인접해 있는 순창·남원에 남아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관군도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지 며칠 뒤 강화병 200명만 남겨 전주성을 지키게 하고 대부분은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지나간 전라도 일대에는 치안과 행정이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고 어떻게든지 복구되어야 할 형편이었다.
양호순변사 이원회는 6월 22일에 효유문을 내려 민폐의 근절과 관리의 탐학을 엄금할 뜻을 밝히는 한편, 각자 면리(面里)에 집강(執綱)을 두어 민간에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집강을 통해 영문(營門)에 호소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을 그의 감영으로 초치하여 치안의 복구와 관민의 화합에 대한 방책을 상의하였다. 동학교도의 협력이 없이는 지방행정의 질서와 수령의 위신은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강소는 전라도 53주(읍)의 관아 안에 설치된 일종의 민정기관이었다. 이 집강소의 설치로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은 사실상 이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전주에는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집강소에는 분장을 나누어 집강 밑에 서기·성찰(省察)·집사(執事)·동몽(童蒙) 등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분담케 하였다.
전봉준은 수천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금구·원평 등지를 근거로 하여 전라우도를 관할하고,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로 하여 전라좌도를 관할하였다. 그리하여 수령들은 형식상의 지위에 지나지 않았고, 또한 서리들은 모두 동학에 입적(入籍)을 해야만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집강소에서는 동학농민군의 봉건제 개혁요구였던 폐정개혁도 추진하였는데, 그 요강은 이 때까지의 주장이 수정 정리된 12개 조목으로 되어 있다. 이 조목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일부 학자에 의하여 부정되고 있으나, 동학농민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던 동학교도의 기록이며, 이보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되었던 강령·격문·포고문·원정서 등의 내용과 크게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개혁안 제시를 간략히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탐관오리의 숙청, 동학농민군의 참정권 요구, 양반토호들의 탐학 배격, 토지재분배의 요구, 노비해방 등 반봉건적 개혁요구와 일본세력의 배격 등 1884년 갑신정변 때의 개혁 정강보다도 혁신적인 주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칠반천인(七般賤人)의 대우개선도 요구하여 노비해방과 함께 모든 천민의 해방을 추진하였다.
한편 집강소에서는 그들이 제시한 12개 조목의 개혁안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따랐다. 이미 관에서 작성된 문부(文簿)를 그들 자신이 검열하여야 했고, 농민들의 소장(訴狀)도 처리해야 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이미 전주성에서 철수하여 각자의 출신지로 돌아갔을 때 마을마다 포(包)를 설치한다는 구호로 조직망을 침투시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욱 포교에 힘써 전라도에서는 청소년의 대부분이 동학에 입교하여 접(接)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주변의 각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쳐 동으로는 경상도 일대, 북으로는 충청·강원도는 물론 경기·황해·평안도에까지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이보다 앞서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하는데 어려움을 깨닫고 먼저 청국에 대한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거한 전후의 일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요청은 원세개(袁世凱)를 통하여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전해지고, 그는 즉각 파병을 명하여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6월 8일과 12일 사이에 아산만에 도착하게 하였다.
한편 청국이 톈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조선파병을 통고해 오자, 일본도 즉각 파병을 청국에 통고하는 동시에 일본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서 12일 사이에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이리하여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 양국 사이에 전운(戰雲)이 짙어져 갔다.
국내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전봉준으로 하여금 집강소에서 정세만 관망할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이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은 그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다시 봉기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면서 기포(起包)하자, 이에 호응하여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으며, 이는 집강소를 통해 연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은 처음 종교적 입장을 고수하여 무력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남접의 전봉준 등을 가리켜 ‘국가의 역적이며 사문(師門)의 난적’이라고까지 극언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접주들의 권유를 받은 오지영(吳知泳)이 그 조정책에 나서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 앞에 남·북접을 화해시켜 공동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손병희(孫秉熙) 지휘하의 1만 명에 이르는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청산(靑山)에 집결하고, 곧 남·북접이 논산에서 합세하여 공주로의 북상계획을 세웠다. 11월 하순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해 있을 무렵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도 산발적으로나마 항일전이 벌어졌는데, 목천·세성산(細城山)은 김복용(金福用)·이희인(李熙人) 등이, 수원은 김정현(金鼎鉉)·안승관(安承寬) 등이, 홍천은 고석주(高錫柱), 공주는 최한규(崔漢圭), 옥천은 정원준(鄭元俊) 등의 동학접주들이 점거하였다.
한편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였다는 소식은 충청감사 박제순(朴濟純)에 의해 정부에 보고되고, 곧 관군을 출동시키자 일본군도 이어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11월 하순에 이르러 전봉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상당수가 이탈하여 북상한 수는 겨우 1만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밖에 북접의 김복명(金福明)이 거느린 동학농민군 1부대가 목천 세성산에 포진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남방 해상으로부터 상륙할 것에 대비하여 손화중부대는 나주에, 김개남부대는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음으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11월 27일목천 세성산의 전투였는데, 여기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김복명이 붙잡혀 죽고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배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서전에서 참패시킨 일본군과 정부군은 공주로 진격하여 전자는 우금치(牛金峙)에, 후자는 이인(利仁)과 효포(孝浦)에 진을 쳤다.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하던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노성읍(魯城邑)에서 공주의 경천점(敬天店)에 이르는 지역까지 이인역(利仁驛)으로 전진하였고, 다른 부대는 효포(孝浦)에 다다랐으며, 또 다른 부대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인 대교(大橋)로 나아가 공주를 포위하였다.
전봉준은 공주성 공격을 결행하기 위하여 전주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과 광주지방의 손화중에게 통문을 보내 북상, 내원하도록 요청하였다. 11월 29일 이인 방면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정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이튿날 이두황(李斗璜)이 거느리는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효포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일단 저지당하고, 양군은 공주를 앞에 두고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12월 11일 동학농민군은 웅치(熊峙) 방면에 대한 총공격을 가하였으나 도리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양군 사이에는 혈전이 벌어지고 끝내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점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6, 7일간 머물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김개남의 동학농민군 5,000명이 북상해 옴으로써 합세하게 되자 기세를 돌이키게 되어 다시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정부군은 공주의 공주 본영과 계룡산 뒤편인 판치(板峙)와 이천역 등으로 병력을 3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었는데, 우선 동학농민군이 판치 방면을 공격하자 정부군은 쫓겨 우금치에 있는 일본군 진영으로 후퇴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다시 우금치로 육박하자 이곳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금치의 공방전은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혈전이었다. 그러나 6, 7일간에 걸친 40∼50회의 격전을 치르는 공방전 끝에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노성·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1만여 명의 병력 중 겨우 살아남은 500여 명으로 항전을 거듭하면서 전주·태인을 거쳐 금구·원평까지 후퇴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모두 해산하였다.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부대도 북상하여 청주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다시 전주로 후퇴하고 여기서도 공격을 받아 태인 방면으로 패주하다가 김개남은 붙잡히고 말았다.
또 손병희의 북접 주력부대는 순창에까지 몰렸다가 본거지인 충청도로 북상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습격을 받고 마침내 충주에 이르러 해산되었다. 그 뒤 일본군과 정부군에 쫓기고 있던 전라도지방의 동학농민군은 한때 순천에 집결하여 여수의 좌수영을 향해 진격한 바 있으나 오래지 않아 패배하여 해산되었다.
이 무렵 강원도에서도 동학교도가 봉기하였다. 10월 초 영월·평창·정선에서 수천 명이 일어난 것을 신호로 강원도의 각 지방에 그 세력이 미쳤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섬멸작전에 의해서 대부분 그 지도자인 동학의 접주·성찰 등이 체포되어 효수되자 이내 해산되었다.
황해도에는 동학이 비교적 널리 포교되어 있어서 1893년의 보은집회에 황해도의 동학접주가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황해도에서 동학교도가 크게 봉기하게 된 것은 1894년 10월 하순 장연에서 수만 명이 일어나 해주성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재령·안악·평산·봉산·신천 등지에 세력이 미치었으나, 이것 또한 일본군과 정부군의 합동작전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다른 한편 금구·원평 방면으로 후퇴하였던 전봉준은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기를 다짐하던 중 1894년 12월 30일 밤 불의의 습격을 받아 관군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듬해 4월 23일전봉준은 김덕명·성두환(成斗煥)·최영남(崔永男)·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최후를 마쳤다.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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