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이며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라고도 한다.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 내정에 관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조선 침략을 위한 영향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는데 명성황후가 이를 주도하였다. 이에 친일세력인 박영효는 1895년 7월 명성황후시해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달아나고 친일파는 세력을 상실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게다가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밖에 안되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였으며,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이고, 행동대는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었다.
이들은 미우라의 직접 지시하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고종의 왕후인 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당초부터 은밀히 진행된 사건인 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측이 철저히 자료를 인멸, 왜곡했기때문이다. 미우라는 대원군이 사건을 주모하였으며 왕후의 시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한 것이라고 위증하였는가 하면, 공정한 재판을 통해 자국의 불명예를 씻겠다던 일본정부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들어 범죄에 관련된 일본군민 모두를 무죄 방면하였다.
나아가 사건 현장에 참여했던 기꾸치 겐죠[菊池謙讓],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등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의 일본인 기자는 후일의 저작(『대원군』,『조선근대사』,『민후조락사건』,『조선잡기』등)을 통해 대원군과 왕후의 갈등구도로 한국근대사를 날조하였고, 이 사건에 대해서도 그렇게 기술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 일반에게는 이 사건이 일본의 국가적 범죄라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반면 일본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일본측 연구자들은 미우라가 단독으로 계획하여 자행한 것으로 그 이상의 배후는 없으며 조선측에서도 대원군이 적극 협조하였다는 입장이다.
즉 왕후 민씨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대원군과 미우라가 공모한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사건 현장의 지휘구도에 대해서도 일본군 장교 대신 낭인배의 역할이 중심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원군이 이 음모와 무관함은 재일사학자 박종근(朴宗根)이 이미 일본측 자료의 정밀한 추적을 통해 밝혀 놓은 바 있고, 사건의 주요 무력 기반이 일본군이었음도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였던 야마베 겐따로[山邊健太郞]가 밝혀 놓았다.
남은 의문은 사건에 대원군이 간여했는가, 혹은 일본 정규군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사건 배후구도는 어떠하며, 일본측이 왕후 민씨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일본정부가 여타의 수단을 배제한 채 그토록 야만적인 수단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한국측 연구자들은 일본정부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다고 보고 있다. 대원군의 요청에 일본국을 대표하는 공사가 선선히 응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거니와 조선군 훈련대의 거사에 일본군이 요청을 받아 지원을 해 주었다는 논리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국을 대표하는 공사가 정부의 지시도 없이 그와 같은 범죄를 독단적으로 계획하고 자행하였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일전쟁에서 이 사건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만주를 둘러싸고 전개된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래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의 제1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목표는 서세동점의 위기를 타개하고 자국의 활로를 모색한다는 취지하에 설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목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청국과 러시아였다. 청국은 자국의 수도 북경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을 통해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상황에서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하다는 입장하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청국과는 물론, 러시아와도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러한 인식은 이미 1890년대초에 드러나고 있었다. 수상 야마가타[山縣有朋]는 그의 의견서(1890.3)에서 ‘일본의 이익선의 촛점은 실로 조선에 있으며 ……조선의 독립은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는 날 살얼음을 딛는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1880∼1890년대에 걸쳐 일본이 군비확충에 박차를 가한 것이나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조선과 만주에 밀정을 파견하여 정보수집에 열중하였던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일본이 광개토왕능비문의 탁본을 입수하여 비문 날조를 시도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이렇듯 일본은 조선침략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으며, 1890년대 초중반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봉기(1894)는 일본이 고대하던 전쟁 도발의 적기로 포착되었다. 농민봉기는 그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일본에게 적절히 이용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하관조약(1895.4.17)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제1조)’ 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제2조) 등을 명시하였다.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지배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모든 전쟁비용을 상회하는 2억냥의 배상금을 부과시켜 청국의 재정을 곤두박질치게 하는 대신,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행태에 제동을 건 몇몇 나라가 있었다. 가장 민감한 대응을 보인 쪽은 러시아였다.
청일전쟁 초기 관망하던 러시아는 전장(戰場)이 만주로 확대되자, 일본의 목표가 자국의 시베리아횡단철도에 향해져 있음을 깨닫고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이어 강화조약에 요동반도의 할양이 명시되었음을 확인하자, 러시아는 즉각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쪽으로 방침을 굳히고, 불·독을 끌어들여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4.23)을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에서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도 반일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러시아세력과 손을 잡고 일본세력을 축출(引俄拒日)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후에서 유도한 것은 주한러시아공사인 베베르(Karl I. W○ber: 韋貝)였지만, 조선측의 핵심 인물은 왕후 민씨였다.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견제하려는 것이었고, 왕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압제로부터 탈피하여 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베베르는 영·미·불 등 열국공사와 함께 이노우에를 방문하여, 한반도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독주에 대해 경고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파악한 왕후는 이노우에의 행동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섰는데, 때문에 이노우에의 조선 ‘보호국화’ 기도가 장벽에 부딪쳤다.
이후 일본에서는 요동반도 환부와 조선문제의 처리를 놓고 비상이 걸렸다. 내각회의가 거듭되었고(6.4), 이노우에도 본국에 휴가를 요청하여 귀국하였다(6.7, 서울 출발. 6.20, 요코하마 도착). 일본에 도착한 이노우에는 (1) 자신의 후임으로 미우라[三浦梧樓]를 추천하고, (2) 내각회의에서 500(후에 300)만엔을 조선에 제공할 것을 건의하였다(7.10∼7.11).
그런데 일본정부가 외교에 문외한인 육군중장 출신의 예비역 장성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측 당로자들의 주장은 모호하다. 이토(『伊藤博文傳』)는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추천하였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라 하였다.
반면에 이노우에(『世外井上公傳』)는 미우라의 파견은 이토가 결정한 일이라 하였으며, 미우라 자신은 이토와 이노우에가 자신을 한국으로 밀어내듯 쫓아보냈다(『觀樹將軍回顧錄』)고 하였다.
당시의 조선사태에 대해 이토는, “만일 종래처럼 한국의 개혁을 추진한다면 러시아의 방해를 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중단한다면 일청전쟁은 전혀 그 의의를 상실하는 동시에 도리어 러시아에게 한국을 엿볼 수 있는 기회까지 허용할 우려가 있어 난처하다”(『伊藤博文傳』)고 하였다.
사진기까지 휴대하고 왕후시해의 현장에 ‘출동’하였던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 기자 고바야카와도 후일 이렇게 기록하였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의도에서 보거나 거액의 전비를 쓰고 자국의 청년들을 희생시킨 점에 비춰 본다면, 또한 동양장래의 평화와 일본제국의 영원한 안위를 생각한다면, 러시아세력의 신장을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니 ……오로지 비상한 수단으로 한러 관계를 차단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즉 러시아와 왕실이 굳게 악수하며 서로 호응하고 온갖 음모를 다함에는 일도양단(一刀兩斷)!……환언하면 왕실의 중심이요, 대표적 인물인 민후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결탁할 당사자를 상실케 하는 이외에 다른 좋은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에 민후를 궁중에서 제거한다면 베베르 같은 자가 누구를 통해 한국의 상하를 조종할 수 있겠는가......한국의 정치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민후의 위에 있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민후조락사건』).
일본정부의 당면 과제는 조선문제의 처리였고, 그것은 러시아와 상대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상대하지 않고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손쉬운 방법은 직접 조선쪽을 상대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일본이 당면한 내외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향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조선의 어떤 인물이나 집단에 대해서도 미리 쐐기를 박자는 정략이기도 했다. 조선인들에게 공포심을 자아내 일본에 대한 저항의욕을 봉쇄하려는 심리전적 조치이기도 했다.
외교에 문외한인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가 떠밀다시피 하여 주한공사로 파견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일본의 내각회의에 참석한 뒤, 7월 하순 서울로 돌아온 이노우에는 종래의 위압적 자세를 전환, 미처 확정되지 않은 300만엔 기증금 제공 건을 확언하며 고종과 왕후의 환심을 사려하였다.
이노우에는 후임자인 미우라가 부임(공식임명: 8.17, 서울도착: 9.1)하였지만, 업무인계를 핑계로 17일간을 일본공사관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가 서울을 떠난 것은 9월 17일, 인천에서 4일간 더 머물다가 일본으로 향했으니,(9.21) 왕후를 시해하기 불과 17일전이다.
그가 서울을 떠난 직후 서울에서는 왕후제거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10월 3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공사관 서기]·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 포병중좌] 등이 왕후시해의 구체안을 확정하였다.
이들은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주력으로 조선정부의 일본인고문, 한성신보사 사장과 기자, 영사경찰, 낭인배 등을 고루 동원하였다. 만일의 경우 사후 책임전가를 위해 왕후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교관은 일본인)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 명성황후 시해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패들이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일본인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였다. 계획이 개시된 것은 새벽 5시(일본측 자료는 5시 45분으로, 약 한시간 오차). 경복궁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엄호하에 광화문을 열어 제쳤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궁궐 시위대병사 8∼10명과 홍계훈(훈련대 연대장)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의 문(추성문), 북동쪽의 문(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의 문(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곧 무너졌다. 이후 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사복차림의 일본인이 현장을 지휘하였고, 일본군 장교(2명)가 이를 보조하였다. 주한영국영사 힐리어(Walter C. Hillier)는 사건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1895.10.11).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조선군 복장을 한)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 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왕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때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왕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양팔목을 잘려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그 뒤 흉도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 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그 때 왕후의 의녀(女侍醫)가(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 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주한영국영사의 보고문』).
상황이 일단락되자 일본인들은 왕후의 침소까지 약탈하고 유유히 광화문을 빠져나갔다. 한편 일본공사관에서 초초하게 사태의 결과를 기다리던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응한 형식으로 입궐하였다(6시경). 그러나 즉시 그는 사태의 은폐공작에 들어갔다. 먼저 고종을 핍박하여, 당일로 신내각을 조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꾸며, 고종이 왕후를 폐한다는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그런데 고종의 서명도 없는 날조된 조칙이었다. 이어 그는 사건을 조선군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였다.
다음날 이 사건의 ‘범죄자’들인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일본인이 가담하였다는 ‘소문’의 사실여부를 규명해 달라는 위장된 내용의 문서를 외부에 보내, 조선측 스스로가 일본군민의 가담을 부인하는 희한한 공문까지 확보해 두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당일부터 서양외교관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당시 만행이 왕태자·다이·사바틴(다이의 보조역)·현흥택·의녀(醫女)·궁녀·궁중하인 등에 의해 각기 다른 위치에서 목격되었고, 열국 외교관들도 이를 간접적으로 접하였기 때문이다. 알렌(미국공사관 서기)이 총소리에 놀라 깬 것은 새벽 5시. 곧 이어 이범진으로부터 고종의 화급한 전갈을 받고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함께 입궐하였다.
그들은 궁궐에 도착하여 산만한 복장의 칼찬 일인들이 광화문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7시). 입궐 후 한시간 반 가량을 기다리다가 방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고종과 미우라가 있었다.
당시 미우라는 고종에게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을 막아달라는 고종의 요청으로 일본군을 보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사태는 일단락된 뒤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렌 등이 직간접으로 접한 현장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일본군·영사경찰·공사관원·낭인배 등이 왕후시해를 자행하였음과 미우라가 이들의 사주자임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알렌·힐리어(Walter C. Hillier: 영국영사)·웨베르 등 주한외교관들의 보고와 뉴욕헤럴드의 특파원 코커릴 등에 의해 사건이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초 일본정부는 외교와 언론 등을 통해 일본 군민은 사건과 하등 관련이 없으며, 대원군과 조선왕후의 ‘중세적’ 정권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열국 여론의 비난을 받은 일본정부는 미우라가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시인하면서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천명하였다.
이어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를 주한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이노우에를 왕실문안사라는 명목으로 서울에 파견하여 사태 호도에 나섰다. 아울러 미우라와 스기무라 이하 약 50인에게 퇴한명령(10.18)을 내려 이들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하였다. 잠시 국제여론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뒤 조선에서 돌발한 춘생문사건(11.28)이 일본측에 의해 역이용되었다. 웨베르·알렌 및 이범진·이완용 등 조선의 친미·친로파 인사들이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고자 한 사건이다.
그런데 일본정부와 언론은 이 사건에 주한열국외교관들이 관계되었다고 선전하며, 다른 열강들도 조선내정에 개입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논조를 펴면서, 그들의 을미사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기회로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후 을미사변에 대한 국제여론의 비판은 잠시뿐, 각국 정부의 반응은 정반대의 기류를 타고 있었다.
영·미·러 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외교관들의 행동을 자제토록 지시하였다. 이토오 이하 일본정부의 인물 및 각국주재 일본외교관의 다양한 사태무마책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서양 외교관들은 이 사건에 미우라가 직접 관계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밝혔으나 더 이상의 배후는 추구하지 못하였다.
다만 상해에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발간한 ‘북화첩보’(北華捷報: The North China Herald)에서는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다양한 보고를 토대로 이렇게 보도하였다.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 이 사건은 미우라가 일본을 떠나오기 전에 계획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지휘계통은 ‘이토내각(배후)->이노우에(중개역)->미우라(하수역)’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얼마 뒤 일본정부에서는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 하여 전원 무죄 방면하였다(1896.1.20). 범죄자들은 감옥에서조차 일본의 관민으로부터 영웅처럼 대우를 받았고, 미우라가 석방되어 동경에 도착하자 일본천황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북화첩보’에서는 “일본정부는 이 음모를 사전에 알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희색은 만면 …… 사건과 일본정부의 관계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일본정부와 사건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을미사변은 단발령과 함께 19세기말 항일의병이 봉기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신변이 위태롭게 된 고종이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 명성황후 승하 그날의 기록 >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10월 15일 임오 1번째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왕후의 승하를 반포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지난번 변란 때에 왕후(王后)의 소재(所在)를 알지 못하였으나 날이 점차 오래되니 그 날에 세상을 떠난 증거가 정확하였다. 개국(開國) 504년 8월 20일 묘시(卯時)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승하(昇遐)하였음을 반포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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