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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재2

남인(南人)의 영수, 고학(古學)에 심취하다 < 허 목 > 허목(許穆, 1595~1682)은 송시열과 예학(禮學)에 대해 논쟁한 남인의 핵심이자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립되었을 때는 청남의 영수로서, 조선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학문적으로도 독특한 개성을 보인 인물이었다. 주자성리학을 중시하던 17세기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원시유학(原始儒學)인 육경학(六經學)에 관심을 두면서 고학(古學)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도가적(道家的)인 성향도 깊이 드러냈으며, 불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후기 강성 정치인의 면모를 뚜렷이 갖추었으면서도 개성 있는 학문세계를 추구한 허목의 학문과 정치활동 속으로 들어가 본다. 허목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 2020. 6. 27.
2차 예송논쟁 - 갑인예송 2차(갑인예송)는 자의대비가 시어머니로서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벌인 논쟁이다.(현종 15년) 1차 논쟁 때 말싸움은 이겼지만 하마터면 역적으로 몰릴 뻔 했던 서인들이 이번에는 더 버티지 못하고 정권을 내놓는 것은 물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송시열까지 도태되는 대사건으로 번졌다. 남인이 승리한다. 예송논쟁은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 상징성이 엄청났던 사건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단순한 복식 정도였지만, 배경적으로는 서인과 남인(더 정확하게는 동인) 시절부터 있었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조선의 통치 체제 문제까지 걸려 있던 일대 격전이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효종의 정통성과 맞물려 대폭발로 이어진 것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실제 송시열이 체이부정.. 2020.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