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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2차 예송논쟁 - 갑인예송

by 무님 2020.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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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갑인예송)는 자의대비가 시어머니로서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벌인 논쟁이다.(현종 15년) 1차 논쟁 때 말싸움은 이겼지만 하마터면 역적으로 몰릴 뻔 했던 서인들이 이번에는 더 버티지 못하고 정권을 내놓는 것은 물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송시열까지 도태되는 대사건으로 번졌다. 남인이 승리한다.

 

 

예송논쟁은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 상징성이 엄청났던 사건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단순한 복식 정도였지만, 배경적으로는 서인과 남인(더 정확하게는 동인) 시절부터 있었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조선의 통치 체제 문제까지 걸려 있던 일대 격전이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효종의 정통성과 맞물려 대폭발로 이어진 것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실제 송시열이 체이부정 이야기를 꺼낸 순간 정태화가 기겁하고 막아서며 경안군 이석견을 이유로 송시열을 막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예송은 시작부터 왕의 정통성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였다. 다만 정통성 논쟁은 말을 꺼낸 순간부터 역모로 처벌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나마 곁다리로 낀 상복으로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논쟁 당사자들도 상복은 그저 꼼수라는것을 시작부터 알고 있어서, 정태화가 이석견(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을 이야기하거나, 윤선도가 상소에서 왕의 적통과 종통을 이야기한 것이다.
논쟁에서 진 이후, 야당으로 계속 갈 것 같던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정계 개편을 시작하고, 먼 훗날이긴 하지만 숙종과 경종, 영조 대에 여러 위기를 넘으면서 다시 정권을 잡는다.

 

1674년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했다. 이 때도 자의대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이 얼마냐는 문제로 논란이 벌어지게 되었다. 효종 때는 경국대전이 장남과 차남을 같게 취급해 기년복을 입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며느리의 경우 사정이 달라 맏며느리는 기년복인데 다른 며느리는 9개월짜리인 대공복(大功服)을 입도록 규정해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 서인은 왕후니까 기년복으로 얘기해놓고 왕의 결재를 받았는데 송시열의 말에 따르면 9개월이 맞는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결국 왕에게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에 현종은 몹시 화를 내었다. 지난 번 송시열과 논박을 펼쳤던 윤휴나 허목은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대구의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를 올려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2차 예송이 터지게 된다. 송시열은 이번에도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인선왕후도 맏며느리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9개월만 입어도 된다고 주장했고, 서인들은 주례·의례에 맏며느리를 위해 9개월 동안 상복을 입게 되어 있음을 들어 대공복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현종은 '전에는 지금의 법을 썼는데 이제는 옛날 법을 쓰라니 일관성이 없지 않냐'는 논리로 서인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논리 상 현종이 밀리는 건 아니었지만, 졸지에 이렇게 되니 대비는 '아들에게도 1년 상복을, 며느리에게도 1년 상복을 입는' 또 다른 의미의 예법 붕괴가 일어났다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년) 7월에 벌어졌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 현종은 송시열에게 싸늘하기 그지없는 비망기를 내려 송시열을 질책했고 서인들과 송시열은 최대의 정치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남인이 득세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던 현종은 송시열의 제자이자 서인 출신인 김수흥을 영의정에서 파직하고 남인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는 대신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을 좌의정으로 삼아 조정의 균형을 맞추었고 남인이 자신에게 가세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2달도 채 지나지 않아 시기 적절하게(?) 8월 18일에 숨을 거둔다. 효종 때처럼 너무 타이밍이 절묘해서 송시열이 현종을 독살한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하지만 예송논쟁 자체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고 송시열과 서인이 역적으로 멸문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왕을 암살할 정도의 위기도 아니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숙종 시절에 그 말이 안 나왔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인선왕후는 현종의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죽은지 얼마 안 돼서 한창 슬퍼할 시기에 눈물도 참아가며 논쟁을 해결하느라 애를 써야 했으니 병이 악화되기 충분한 환경이었고 실제로 현종은 모후의 빈소에서 죽었다. 어쨌거나 뒤이어 즉위한 숙종은 이 예송을 근거로 송시열이 예송을 잘못 이끈 죄를 물어 서인들을 내쫓았다.
이 예송의 판정승은 남인이 잠시 득세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숙종 때의 환국도 현종이 어느 정도 판을 만들어 뒀으니 가능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송논쟁은 고작 상복 입는 기간만으로 말싸움한게 아니라 적자 승계 원칙과 관련된 효종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 논쟁에 가깝다. 원칙적으로 인조의 장남인 소현 세자가 죽은 뒤에 계승권은 인조의 맏손자이자 소현 세자의 아들인 경선군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문제는 인조의 차남인 효종이 계승한 것이다. 인조가 소현 세자의 가계를 싹 쓸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인데 원칙적으로는 효종과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엄밀히 말하면 왕위 계승의 법칙에 위배되는 셈이다. 여기서 상복을 3년 입자는 쪽은 그래도 정통성이 있다는 쪽이고 1년 입자는 쪽은 정통성이 없다는 쪽에 가깝다.
또한 예송논쟁은 사회계급 논쟁이기도 했다. 예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최고권력자가 초월자냐, 아니면 지배계급의 일원일 뿐이냐의 논쟁은 현대에도 결코 가볍게 보아넘길 문제가 아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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