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許穆, 1595~1682)은 송시열과 예학(禮學)에 대해 논쟁한 남인의 핵심이자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립되었을 때는 청남의 영수로서, 조선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학문적으로도 독특한 개성을 보인 인물이었다. 주자성리학을 중시하던 17세기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원시유학(原始儒學)인 육경학(六經學)에 관심을 두면서 고학(古學)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도가적(道家的)인 성향도 깊이 드러냈으며, 불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후기 강성 정치인의 면모를 뚜렷이 갖추었으면서도 개성 있는 학문세계를 추구한 허목의 학문과 정치활동 속으로 들어가 본다.
허목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허목 학문의 연원에는 16세기 개성(開城)을 무대로 특색 있는 학문 성향을 선보인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 있었다. 허목의 부친 허교(許喬)의 묘비문에는 “공은 어려서 수암(守庵) 박지화 선생에게 수업하였는데, 수암 선생은 화담 서경덕 선생의 제자이다.”라고 기록하여 허교의 학문에 서경덕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서경덕의 학문은 성리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절충하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성향은 허교에 이어 허목에게까지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허목의 학문 형성에는 경상우도라는 지역적 기반도 영향이 컸다. 허목은 젊은 시절 부친의 임지를 따라 창녕ㆍ의령 등 조식(曺植, 1501~1572)과 정인홍(鄭仁弘, 1535~1625)의 학문적 영향력이 남아 있는 경상우도 지역에 머무르면서, 남명학파(南冥學派)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해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를 명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는데도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해 영동(嶺東)으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다.
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다. 그 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 등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그 뒤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9년 장령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효종이 죽자 소를 올려 상례를 논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했고, 다시 장령이 되었다. 그 때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당시 송시열 등 서인(西人)은 『경국대전』에 의거해 맏아들과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朞年服: 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儀禮) 주소(註疏: 경서 등에 해석을 덧붙인 것)에 의거해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에 해당된다고 해석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해 사실상 맏아들 노릇을 했으니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674년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대공복(大功服)으로 9개월을 정했으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해복제가 거론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맏아들·중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했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 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해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례(古禮)의 체이부정설이었다. 이는 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 즉위한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송시열 등 서인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그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직소를 올렸고, 병이 나자 숙종은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1675년(숙종 1) 이조참판·비국당상(備局堂上)·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하였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보지 않고도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 그 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남인은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청남(淸南)으로 갈라졌고, 그는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그 뒤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지패법(紙牌法)·축성(築城) 등을 반대했으며, 그 해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그러나 사임을 아무리 청해도 허락하지 않아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다시 예궐하였다. 특명으로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로서 기로소에 든 것은 특례였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해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尹鑴)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해,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해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1680년(숙종 6) 서인들의 정치적인 반격인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난 것이다. 허적의 권력 남용과 허적의 아들 허견의 역모 혐의가 발단이 된 경신환국으로 권력은 다시 서인이 잡았다. 환국의 여파로 허적과 윤휴 등 남인의 핵심 인사들이 사사(賜死)되었고, 허목이 이끌었던 청남도 정치적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중앙 정계에서 남인이 실세(失勢)한 아픔을 달래면서 허목은 연천의 은거당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냈고, 1682년 88세를 일기로 임종을 맞았다. 그의 묘소는 은거당 뒤쪽 100여 보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다.
대표작은 강원도 삼척에 있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銘)>를 비롯하여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 <함취당(含翠堂)>, <애민우국(愛民憂國)>, 행서로 <백운계기(白雲溪記)>가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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