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현종 즉위 후 일어 난 예송논쟁 - 1차 예송 논쟁

by 무님 2020. 6. 22.
728x90

1차 예송 논쟁은 현종 즉위 시기 자의대비의 상례 절차인 상복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벌어진 두 차례의 정치적 분쟁이다. 왕위에 오른 현종과 신하들은 나라의 중심을 잡기 위해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예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를 세우려고 했었다. 보통 예절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잘 따라야 한다는 규칙이 더 많았다. 신분이 낮은 백성이 신분이 높은 양반의 말을 잘 따라야 한다는 식이였던거다. 그럼 사회에는 질서가 생기고, 높은 사람들이 아랫사람들을 다스리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왕과 신하들이 예절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였다. 그래서 누가 윗사람이고 누가 아랫사람인지를 정하는 것은 무척 예민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첫째 아들(맏아들)에게 모든 힘을 몰아주는 것으로 사회 분위기가 굳어 있었다.

 

 

1차(기해예송)는 효종이 사망하자 자의대비가 계모로서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벌였던 논쟁이다. 인조반정 소현세자의 죽음으로까지 되짚다 보면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을 건드리기 때문에 목숨을 건 격렬한 싸움이 이어졌다. 서인이 결과적으로는 이기지만 현종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되고 만다.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이 얼마냐는 문제가 발생했다. 효종이 장남이 아니지만 국왕이었으므로, 의붓어머니인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1년짜리 상복인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는가 3년짜리 참최복(斬衰服)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된 것이다. 막 대행대왕이 된 세자 현종은 송준길과 송시열에게 일을 맡겼다. 이 모든 일은 할아버지 인조가 나이 차이가 많은 어린 부인인 자의 대비를 계비(두 번째 왕비)로 맞이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었다. 인조의 나이 44세일 때, 계비의 나이는 15세였다. 인조의 아들인 효종보다도 다섯 살이나 어렸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들 격인 효종, 며느리 격인 인선 왕후가 죽을 때까지도 자의 대비가 살아 있는 특이한 경우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원래 영의정 정태화는 일반적으로 하던 '장자이든 차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의 예를 따르려 했지만, 윤휴는 <의례>에 따라 효종이 장남은 아니되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니 참최복이 맞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이외에도 다양한 신하들이 다양한 의견을 냈다. 이에 이시백이 문제를 고심하다 정태화에게 편지를 보내고,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물어봤는데, 송시열이 짐짓 '4종지설四種之說'을 꺼내든다.

'4종지설(四種之說)'은 바로 그 <의례>에 적혀있는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로 아래와 같이 4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 맏아들인데(正體) 자손을 얻지 못함(不得傳重)

  • 적통인데 아들이 아닌 자손이 계승(正而不體). 이를테면 적장자의 적장자가 후사를 이은 경우

  • 아들이긴 하지만 적장자는 아님(體而不正). 맏아들이 아닌 다른 아들이 후사를 이은 경우

  • 적통도 아니고 아들도 아님(不正不體).

그런데, 효종은 체이부정體而不正, 맏아들이 아니므로 자의대비는 중자(衆子)에게 적용되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뜻이다. 영의정 정태화는 이 표현의 파괴력을 직감하고는 깜짝 놀라 손을 흔들며 말을 못하게 하고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견이 살아있어 그 말은 곤란하니 국조 이래 아버지가 아들의 상에는 보통 기년복을 입었으니까 그냥 국제國制(=나라에서 해오던 관습)대로 따르자고 제안한다. 송시열 역시 <대명률>의 복제 조항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니 따르자 한다.
그러나 1년 뒤인 현종 1년 3월 21일, 허목이 참최를 주장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송준길이 다급하게 반박했지만 허목은 다시 상소를 올려 송준길을 발라버렸고 서인 진영은 크게 동요했다. 서인 중에서도 한당에 속하는 원두표 같은 이들은 아예 허목을 지지하면서 이전의 논의에서 큰 실수를 했다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이때 송시열이 다시금 상소로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1년만 상복을 입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자칫 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서인들은 경국대전과 대명률에는 장남이든 차남이든 다 기년복을 입게 하였으므로 경국대전과 대명률을 따라 기년복을 입자고 실드를 쳤다(정확히 말하면 송시열과 같은 서인 내 학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주장이 아니라 정태화를 비롯한 당대 정치가들의 포장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서인의 학문적인 주장은 '왕이고 뭐고…어쨌건 장자 아니니까 1년이잖아? 그럼 됐지'라는 것이다. 이때만 해도 좋았는데…….

윤선도가 "종묘사직을 잇는 것이 최우선 고려 대상인데 장자가 아니라고 그걸 내치자니? 송시열은 효종의 총애를 받아놓고 이젠 효종이 왕으로 안 보인단 얘기지?!" 라고 상소를 올리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죄로 모함했다고 조정이 뒤집어졌고, 서인은 윤선도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남인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서인들의 윤선도 처벌 요구에 반발하였으며 송시열의 강경한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던 일부 서인들까지 윤선도의 주장에 동조하는 등 조정을 비롯하여 조선 전체가 예송이라는 주제를 놓고 들끓었다. 마침내 현종은 윤선도를 귀양 보내고 정태화를 비롯한 서인 다수의 견해를 받아들여 <주자가례>를 근거로 1년설을 채택한다.
권력적인 구도에서 보면 인조반정 이후 성립된 서인, 남인 공존 체제가 송시열이라는 산당의 영수 등장과 함께 깨질 조짐을 보인 사건이라 볼 수 있고 또한 환국 정치의 예고편으로도 볼 수 있다. 인조 반정 이후 30여년 간 조선의 정치 구도는 집권 서인과 야당인 남인으로 분류되지만, 또한 그 집권 서인이 공서와 청서, 한당과 산당 등의 계파로 갈라져 대립하곤 했기에 남인은 그 사이에서 나름대로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인의 입지는 사실상 관제 야당 수준으로 전락해갔으며 거기에 산당의 송시열이 전면에 나서면서 서인의 계파 갈등이 산당을 중심으로 봉합, 이런 흐름이 남인들을 자극하게 한 것. 그중에서도 남인 중 강경 세력인 청남(윤휴, 허목)이 서인을 똘똘 뭉치게 만든 송시열을 끌어내리기 위해 논쟁을 이끈 것일 수 있다.
비록 이 논쟁이 서인의 판정승으로 귀결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남인 유생들의 반발 상소가 올라오고 몇 년이 지나도록 상소와 주장이 빗발치는 등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불씨는 꼬박 15년 뒤 다시 불타오르게 된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