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6월 2일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하였다.
일본 정부는 6월 2일 서울주재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杉村濬)로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때마침 중의원(衆議院)에서 내각탄핵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내각총리대신 이토[伊藤博文]는 이 보고를 받은 즉시 각의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라는 구실로 제5사단 오시마[大島義昌] 소장 휘하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이미 일본 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내정개혁’을 도모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에 대규모 일본군을 파병, 청일전쟁을 일으키고자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6월 5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大本營)이 설치되고, 동시에 오시마가 거느린 혼성여단 선발대가 요코스카[橫須賀] 항을 출발, 9일인천에 상륙하여 곧바로 서울로 진군하였다. 그 뒤 6월 하순까지 8,000여 명의 일본군이 경인(京仁)간에 집결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대규모 군인을 파병한 데 당황하고 이에 항의, 즉시 철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6월 11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외국군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육전대(陸戰隊)와 함께 서울에 귀임한 오토리[大鳥圭介] 일본공사는, 위안스카이와 3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양국군의 공동 철수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조정은 일본 제국과 청나라에게 "이제 다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라"라고 요구했으나 6월 12일 일본군 혼성 제9여단 선발대, 6월 16일 혼성 제9여단 4000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들은 6월 23일 한양으로 진군해 일부는 용산에 주둔하고 일부는 한양 시내를 진군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갑오개혁을 요구하는 등 점점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급기야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해 버렸다.
당시 조선군 경군(京軍) 중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웠던터라 경복궁을 경비하던 병력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平壤箕營) 병력 일부에 불과하였다. 한편 인근 북한산성에는 경리청(經理廳)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경복궁까지 거리가 있는터라 일본군이 고종을 사로잡을즈음에서야 경복궁 주변 지역에 전개된 상태였다. 서울에 주둔한 오시마 혼성 여단의 병력은 절반인 4천 명이었고, 이 중 1천여 명이 경복궁 전투에 동원되었다.
7월 23일 0시30분 용산에서 밤을 새우며 대기하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의 전보가 도착하면서 경복궁 점령 작전이 실행된다. 새벽 04시경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은 영추문을 통해 궐내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일본군 공병대가 영추문 폭파에 실패하고 돌파가 지연되면서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箕營兵)과 일본군 간 교전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첩보에 의하면 한양의 조선군은 대부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내려가 있어 경복궁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장위영 및 평양에서 온 기영병 군사들이 궁내에서 일부 야영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서울 각지에 주둔해 있었다.
같은 시간 반대편인 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장위영(壯衛營)이 지키는 광화문 일대에서도 일본군과 장위영(壯衛營) 군사들 사이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새벽 5시가 되자 영추문 인근 평양 기영병(箕營兵)이 제압당하고 일본군이 영추문을 폭파시키면서 궐내로 일본군이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광화문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병사들 역시 일본군에게 돌파당하고 만다. 이 때 첩자를 투입해 조선군을 속이는 등 공작을 통해 진입한 일본군 병력이 경복궁 안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조선군이 겁을 먹어 스스로 붕괴되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 조선군은 경복궁 안팎에서 아침까지 만만찮게 저항했다. 허나,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가 지휘하는 2대대 병력 일부가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와 함께 입궁한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는 칼을 빼들고 고종을 위협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고종이 붙잡히고도 전투가 끊이질 않고 오히려 외곽에 있던 경리청과 기영병 군사들은 야포까지 끌고와 궁궐을 포위하면서 오히려 일본군은 위기를 맞이한다. 이에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홍계훈을 협박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격렬했던 조선군의 저항을 기록하고 있다.
'무기를 버리라.'는 김가진의 가짜 왕명이 전달되자 이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일부 병사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총을 파괴하고 군복을 찢을 정도였다. 평양 기영병(箕營兵)들은 일본의 압박에 평양으로 돌아갔고, 한양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 경리청(經理廳) 병력은 모두 무장해제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 8정을 압수했다.
일본군은 효창원 일대(효창공원)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둔 뒤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에서의 독립 선언을 하라는 등 갑오개혁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8월 26일 조선의 김홍집 내각을 통하여 서양의 내정 간섭 및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과 동시에 그를 일본에 돕고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일 양국 맹약을 맺게 된다. 이는 조선 내 일본군의 활동이 매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한다.
1894년 일본의 외무 대신 무츠 무네미츠와 주청, 주한 전권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외무성 참사관 혼노 이치로는 청나라와의 개전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동시에 병력을 증원하였다. 이에 청나라도 위여귀가 이끄는 성군 6천을 평양에 마옥곤의 의군 2천을 의주에 각각 진출시켰다. 이홍장은 러 - 청 비밀 조약에 의거해 러시아에게 일본군 철병 권유를 부탁하였고 러시아는 2회에 걸쳐 철병을 권고하였으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영국은 청나라의 부탁을 받기는 했으나 일본과 비밀 조약을 맺고 전쟁이 양자강 유역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약속받는다.
* 조선왕조실록 < 그날의 기록 >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20일 갑오 5번째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조일 잠정 합동 조관을 작성하다
조일 잠정 합동 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이 작성되었다.
〈잠정 합동 조관(暫定合同條款)〉
【대조선국(大朝鮮國)과 대일본국(大日本國)】 정부는 【조선력으로 개국(開國) 503년 6월 21일, 일본력으로 명치(明治) 27년 7월23일】 두 나라 군사(軍士)들이 한성(漢城)에서 우연히 충돌한 사건을 타당하게 조정하고 또 조선국의 독립(獨立), 자주(自主)의 큰 터전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을 꾀하고 아울러 통상 무역(通商貿易)의 길을 극력 장려하고 발전시켜 두 나라 사이의 우의를 더욱 두터이 하기 위하여 잠정한 합동 조관은 다음과 같다.
1. 이번에 일본국 정부(日本國政府)는 조선국 정부(朝鮮國政府)에서 내정(內政)을 바로잡을 것을 절실히 바랐고 조선국 정부에서도 그것이 바로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권고에 따라 힘써 시행하게 되었다. 각 조항을 분명히 믿고 착실하게 시행한다.
1. 내정을 바로잡을 조목 가운데서 경성(京城)과 부산(釜山) 사이, 경성과 인천(仁川) 사이에 철도를 건설하는 문제는 조선 정부 재정이 넉넉하지 못함을 고려하여 본래 일본 정부 또는 일본국 공사(公司)와 합동할 것을 약속하고 제때에 공사를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조선 정부의 현재 복잡한 사정으로 처리하기 어렵다. 다만 좋은 방법을 계획하여 될수록 기약한 바를 빨리 성취시켜야 한다.
1. 경성과 부산 사이, 경성과 인천 사이에 일본 정부에서 이미 설치한 군무 전선(軍務電線)은 지금의 형편을 참작하여 조항을 협의하여 정하고 그대로 둘 수 있다.
1. 앞으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될수록 화목하게 하고 통상(通商) 업무를 장려할 것을 고려하여 조선국 정부는 전라도(全羅道) 연해 지방에 한 개의 무역항(貿易港)을 열도록 승인한다.
1. 금년 7월 23일 대궐 가까운 곳에서 두 나라 군사가 우연히 충돌한 일을 양측이 각각 추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언명한다.
1. 일본 정부는 평소 조선국을 도와서 독립과 자주의 대업을 성취하게 할 것을 희망하므로 앞으로 조선국의 독립과 자주를 공고히 하는 문제는 일의 적의성에 상관되므로, 따로 두 나라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이 모여서 협의하여 대안을 결정한다.
1. 이상에 열거한 잠정 조항을 수결하고 도장을 찍어 정한 후에 적당한 시기를 참작하여 대궐을 호위하는 일본 군사를 일체 철수시킨다.
이상의 잠정 합동 조관 안에서 영원히 준수할 것은 뒷날 다시 조약을 맺고 준수한다. 이를 위하여 두 나라 대신(大臣)들은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어서 증빙 문건으로 삼는다.
대조선국(大朝鮮國) 개국(開國) 503년 7월 20일
외무 대신(外務大臣) 김윤식(金允植)
대일본국(大日本國) 명치(明治) 27년 8월 20일
특명 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22일 병신 4번째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조일 동맹 조약이 체결되다
조일 동맹 조약(朝日同盟條約)이 체결되었다.
【대조선(大朝鮮)·대일본(大日本)】 〈양국 동맹 조약(兩國同盟條約)〉
【대조선국(大朝鮮國)·대일본국(大日本國)】 정부는 【조선력으로 개국(開國) 503년 6월 23일, 일본력으로 명치(明治) 27년 7월 25일】 조선국 정부에서 청(淸) 나라 군사를 철퇴시키려는 문제를 조선국 경성(京城)주재 일본국 특명 전권공사(日本國特命全權公使)에게 위탁하여 대신 힘써 주도록 약속한 이래 두 나라 정부에서 청나라에 대한 공격과 방어에 서로 도와주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관계되는 사항을 명백히 밝힘과 아울러 두 나라가 일을 함께 이루어 갈 것을 기약한다. 이에 두 나라 대신(大臣)은 각각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체결한 조약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이 동맹 조약은 청나라 군사를 조선 국경 밖으로 철퇴시키고 조선국의 독립(獨立)과 자주(自主)를 공고히 하며 조선과 일본 두 나라가 누릴 이익을 확대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제2조
일본국이 청나라에 대한 공격과 방어 전쟁을 담당할 것을 승인했으므로, 군량을 미리 마련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돕고 편의를 제공하기에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제3조
이 동맹 조약은 청나라와 평화 조약이 체결되는 날에 가서 폐기한다.
이를 위하여 두 나라 전권 대신(全權大臣)들은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어서 증빙 문건으로 삼는다.
대조선국(大朝鮮國) 개국(開國) 503년 7월 26일
외무 대신(外務大臣) 김윤식(金允植)
대일본(大日本) 명치(明治) 27년 8월 26일
특명 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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