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시는 조선 광해군 때의 상궁이다. 미모는 아니나 민첩하고 꾀가 많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이를 배경으로 국정에 관여하여,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그 해독이 컸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제거에 앞장서는 등 광해군의 왕권강화를 위해 온갖 악역을 도맡아했던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궁녀였다.
개시의 시(屎)가 ‘똥 시’ 자이기 때문에 실제 이름은 김개똥이었을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지만, 계축일기에서는 ‘가히’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또 연려실기술과 공사견문록 등에는 그녀의 이름이 각각 ‘개희(介姬)’, ‘가히(可屎)’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녀의 이름 ‘개시(介屎)’는 기존에 흔히 알려져 있는 개똥이가 아니라 ‘가히’의 음차인 것으로 보인다. 개시는 조선 시대 5대 요부라 불리는 인물 중 하나로, 나이가 차서도 얼굴이 펴지 않았다, 즉 못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김개시는 천민의 딸이었지만 선조 때 광해군의 궁녀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선조의 궁녀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이 때문에 광해군과 선조의 나쁜 관계를 잘 중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가 광해군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영창 대군을 세자로 바꾸려고 하는 상황에서 광해군을 김개시가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녀는 선조 임금의 신임을 받고 있던 궁녀로 얼굴은 그리 예쁘지 않았으나, 머리가 비상하고 영민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김개시는 선조 말년에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다음으로 즉위할 가능성이 높은 광해군에게로 정치노선을 선회 하였으나, 선조는 예상을 뒤엎고 다음의 후계자로 인목대비의 어린 아들 영창 대군을 지목하였다.
이에 마음이 급해진 김개시는 선조가 먹는 약밥에 독약을 넣어 왕을 독살하기에 이른다. 선조 사망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궁중의 모든 일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김개시는 선조의 독약 사건을 빌미로 광해군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선조가 급사한 후 광해군이 왕이 되자 김개시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된다. 덕택에 국정에 관여하여,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거의 후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지위는 상궁에 머물렀다. 권력을 잡고 난 이후 김개시는 관직을 돈을 받고 파는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큰 비리를 저질렀고, 윤선도(尹善道), 이회(李洄) 등이 여러 번 상소하여 논핵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었다. 심지어 광해군 치세 말기에는 광해군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는 상소가 여러번 올라왔었는데, 김개시가 그럴 리가 없다고 광해군을 안심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김개시가 반정 세력과 내통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결국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김개시는 반정군에 잡혀 참수되었다.
김개시가 선조에게 이미 승은을 입어 특별 상궁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광해군이 그녀를 총애하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지 못한 이유가 이 때문이라는 것. 이게 사실이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셈이다. 야사에도 김개시를 침실로 들이려던 광해군에게 나이 든 궁녀가 "개시는 선조 대왕의 은혜를 입었다" 라고 간언하자, 광해군의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드러났다고 한다
김개시는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잡혀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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