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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by 무님 2020.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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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의 원래 이름은 이항복, 한음의 이름은 이덕형이다. 이들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활약을 했으며, 조선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다.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눈 이들에 대한 수많은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여러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에 어려서부터 친구로 자란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선 이후에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두 사람 다 율곡()의 추천으로 사가독서()에 참여한 사실, 임진왜란 때에 정치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뛰어난 공을 세운 점,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를 열어 그 유지에 함께 기여하였고, 임해군()이 관련된 사건의 처리 및 인목 대비 폐모론과 영창 대군의 처형 등에 대해서 입장을 같이 하는 등 관직 생활에서 거의 평생 동안 동고동락했음을 알 수 있다.
당파도 이항복은 율곡의 서인 계열이었고, 이덕형은 퇴계(退)의 동인 계열이었지만, 둘 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당쟁에 휩싸이지 않았다고 한다. 관직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벼슬을 교대로 맡았던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이성()의 삼상()[이덕형·이항복·이원익()]으로 불리었다. 이와 같은 평생의 교분으로 한음이 먼저 세상을 뜨자, 오성은 한걸음에 달려가서 손수 염을 하고 장례를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음의 아들이 오성에게 묘지()를 청하자, “그대 아버지가 세상에 없으니 나 또한 진심으로 의견을 나눌 친구가 없어지게 되었구나. 나는 한음보다 나이로 치면 조금 위지만 덕이나 재주로 말하면 한참 아래였건만, 세월이 태평할 때는 같이 홍문관에서 학문을 닦았고 전쟁 중에는 서로 바꿔 가며 병조를 맡았었다. 평생을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다가 이렇게 끝을 맺게 되니 비통한 마음뿐이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책을 맡아 가면서 나를 이해해 주는 이는 그대 아버지뿐이었고, 나는 평생 그를 존경하며 따랐으니, 이제 어찌 친구의 행적을 기록해 주지 않으랴.”고 하며[『한음 이덕형 선생 이야기』참고], 기꺼이 묘지명을 써 주었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둘 사이의 이러한 평생의 우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특히 포천 지역에 연고가 있어 여러 편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먼저 백사[오성]에 대해 알아보면, 『견성지()』에 “수원산 오금사 아래에 옥동반석이 있는데, 50명이 충분히 앉을 만하다. 백사가 홍지성()과 함께 매년 봄, 가을에 이곳에 와서 놀며 감상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것은 백사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포천에 자주 왕래했음을 보여 준다. 기록으로 보아 백사의 할아버지 때에 포천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몽량]는 포천에도 살았고, 집안의 친척들도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도비[1652년, 상촌() 신흠()이 찬함.]에 보면 “할아버지[예신]가 숨은 덕이 있어서 일찍이 포천에다 묘소 자리를 잡고 말하기를 ‘내 뒤에 연이어 2세대가 반드시 출세할 것이다’고 하였다”고 나온다. 죽기 전 북청 유배길에도 포천에 들렀고, 사후에도 포천에 묻혔다.
한음의 경우에는 외가가 포천 자작리에 있어서 어려서부터 왕래했음이 분명하고, 어렸을 적에 양사언과 교유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외숙[유전()]도 영의정을 지낸 바 있고, 후에 임해군이 그 첩을 빼앗고 살해했던 유희서[유전의 아들]는 그의 외종형이기도 하다. 한음은 백사에 비해서 포천과의 연고가 약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일생이 외가와는 아주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결코 작은 인연이라고 할 수 없다.

 

전기적 사실에 나타난 오성과 한음의 성품을 알아보면, 우선 백사는 “어릴 때부터 영리했고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마음이 침착하고 생각이 깊어 도량이 넓었다. 뒤돌아보거나 말을 할 때나 침묵을 지킬 때나 모두 구차함이 없었다. 8세에 시를 지었으며, 나오는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재물을 멀리 했으며, 의리를 좋아하고 웅건하여 얽매이지 않았다. 씨름을 잘하고 공도 잘 차서 거리에서 용력을 내면 여러 소년들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훈계하여 호습[호기 부리던 습관]을 버리고 진실하게 되었다.”
“공의 풍채는 무겁고 원대하며 기품이 높고 넓었다. 넓직한 이마에 우뚝 솟은 콧날에 양쪽 볼은 풍만하고 얼굴은 희었다. 수염은 편편히 휘날리고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않았으나 기운은 일세를 덮었다. 행실은 변폭을 쓰지 않되 움직임에 법도가 있었다.”, “친구와의 교제에 있어서는 진실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의리를 붙들어 승낙하기를 무겁게 하며 취하고 주는 데는 청백하되 구하지 않고, 분간하되 이상한 일을 세우지 않았다.”, “공이 소년 시절부터 기백과 의리를 짊어지고, 늦게는 학문을 좋아했다.”고 신도비를 통해 전하고 있다[신흠이 찬한 신도비 참고].
종합해 보면 백사는 어려서는 한때 호습이 있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서는 의리와 공평무사함을 신조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한음의 성품은 다음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린 나이에도 문장이 뛰어나고 행동이 숙성하여 아이들끼리 놀 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재주가 뛰어났으나 겉으로 내세우질 않아서 사람들은 그의 글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의 학식과 재주를 알아보고 매우 놀라워하였다.[중략] 사람들은 그를 총각 정승이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내가 스승[율곡]을 모욕한 한음의 장인[이산해]을 심하게 비방하였음에도 한음은 그 일로 내게 딴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한음문고』의 「한음 언행록」참고], “한음은 천품이 매우 고상하여 항상 정신이 맑았으며, 겸손하고 절제된 생활로 자신의 재주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한음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몰랐으니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었고 또 그 때문에 만백성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한음문고』의 「한음 묘지」 참조]. 이를 참고하면 한음은 어려서부터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았고, 겸손하였으며 신의가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두 사람이 기질상의 차이점은 있으나, 교우에 있어 신의를 지키고 일 처리의 공명정대함이나 정치적인 중립을 지킨 점 등은 닮았다고 하겠다. 한음 20세, 백사 25세로 1590년 같은 해에 급제하여 동시에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발령을 받으면서부터 둘의 우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한음 문고』참고]. 즉 모두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30여 년간 국가의 대소사를 같이 하면서 깊은 우정을 맺은 것으로 판단된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어려서부터 절친하였던 것으로 나오지만, 나이 차이[5살]와 자란 곳이 그렇게 가깝지는 않아서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백사 연보』 참고].
이들의 우국충정과 제세안민의 충정, 공사의 엄정함, 우정과 해학, 청백리 정신은 오늘날에도 감동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당대의 교유가 현재의 두 집안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실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들 사후에 오래지 않아서 포천의 유생들이 재산을 모아 사우를 세워 각각 ‘화산 서원’과 ‘용연 서원’에 배향한 것도 또한 두 사람의 행적을 길이 후손에 전하고자 하는 포천 사람들의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 오성과 한음 >의 일화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④ 한음의 참을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다.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정()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 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 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이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 놓았던 정을 도로 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⑥ 권율과 오성 :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 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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