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은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문인이였다. 또한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였다. 조선시대 사회모순을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집필하였다. 그외 작품으로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엽(曄)이다. 어머니는 강릉 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봉(篈)과 난설헌(蘭雪軒)과 형제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그를 기렸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선조 35)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이 해에 원접사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했다. 1604년(선조 37)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1610년(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 같은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參榜)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으로 물러났다. 명나라에 여러차례 다녀오면서 수천권의 서적을 가져왔는데 이때 양명학을 접하게 되었고 특히 양명학 극좌파에 속하는 태주학파 이탁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외의 학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허균은 주자학(성리학)의 허구성을 비판하였고 예학이 중심이 된 외곡된 학문을 개혁하고 민중을 위한 실용적 학문으로 조선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문학적으로도 일정한 시문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불교에도 심취하였다.
허균은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해 대북(大北)에 참여했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돼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광해군 9)좌참찬이 됐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광해군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렸다. 이른바 허균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국문이었다. 바로 이전 해 12월 기준격이 비밀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기준격의 상소로 인해 시작된 허균과 관련된 논란은 본인 스스로 무고함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해를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광해군 10년 남대문에 한 장의 격문이 나붙었는데 이것이 결국 허균의 외가 서얼인 현응민의 소행으로 판명되면서 더 이상 허균은 역모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허균의 죄상으로 거론되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무렵에 여진족의 침범이 있자. 중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자 조선이 여진의 본고장인 건주(建州)에서 가까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의 침략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허균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를 만들어, “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서울 도성 안 사람을 공갈하였다. 또한 허균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 “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하였으니, 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노래를 지어, “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니만 못하다.” 하였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서울 안의 인가(人家)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김윤황을 사주해서 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이 허균이 했다는 것 등이다.
허균을 둘러싼 이같은 의혹에 대해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광해군일기]에서는 이것이 당시 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오늘날 이 옥사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광해군 10년 8월 24일 인정전 문에서의 국문은, 허균이 자신이 비록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국문을 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로부터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며 신문하지 않고 사형이 결정된 문서도 받지 않은 채 단지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로만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은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수시화(惺叟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남궁선생전》 등이 있다.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 우리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홍길동전]하면 허균, 허균하면 [홍길동전]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는 아니다. 그런 만큼 [홍길동전]은 허균의 생애와 사고를 응축해 놓은 결정판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물론 최근에 [홍길동전]의 찬자와 관련해서 이견이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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