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임당은 조선전기 「자리도」의, 「초충도」의, 「노안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며 문인으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호는 사임당(師任堂)이다. 사임당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뜻에서 사용된 당호로 임사재(任師齋)라고 칭하기도 했다. 본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름이 인선(仁善)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료는 없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결혼하여 이선(李璿)·이번(李璠)·이이(李珥)·이우(李瑀)의 네 아들을 두었고, 조대남(趙大男)·윤섭(尹涉)·홍천우(洪天祐)에게 출가한 세 딸을 두었다. 딸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맏딸이 매창(梅窓)이란 호를 사용한 기록만 남아있다.
신사임당의 삶은 아들인 이이가 기록한 〈선비행장(先妣行狀)〉이라는 글을 통해서 비교적 자세히 전해진다. 그 기록에 따르면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 10) 음력 10월 29일에 외가가 있는 강원도 강릉에서 신명화와 용인 이씨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의 외조부인 이사온은 대사헌·한성부좌윤·형조참판 등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딸 강릉 최씨(江陵崔氏)와 결혼해서 딸 하나만 낳았는데, 그가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이다. 외조부 이사온은 결혼한 뒤에 처가로부터 오죽헌(烏竹軒)을 물려받아 강릉 북평촌(北坪村)에 살았으며,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아버지인 신명화도 1516년(중종 11) 식년시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인 용인 이씨는 신사임당을 낳은 뒤 줄곧 남편과 떨어져 강릉에 머물렀기 때문에 신사임당도 외가인 강릉에서 성장했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외조부인 이사온의 총애를 받아 그에게 학문과 시(詩)·서(書) 등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녀가 그림에 재능을 보이자 외조부 이사온이 안견(安堅)의 그림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이의 〈선비행장〉에는 신사임당이 7세 때에 안견의 그림을 모방해 산수도(山水圖)를 그렸는데, 그때 이미 매우 절묘한 솜씨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경전(經傳)에 능통하고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바느질과 자수까지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버지 신명화는 신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이에 신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다. 신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1541년(중종 36)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종로구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1551년(명종 6) 봄에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여성상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신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신사임당의 재능은 이미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격만큼이나 그림·글씨·시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畫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신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다.
거기서 신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여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였다.
그러므로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대여 명종 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신사임당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신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 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씨 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이후 두산동 최씨가에서 보관하던 여섯 폭짜리 초서는 1971년 강릉시에 인계되어 율곡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섯 폭짜리 초서는 신사임당초서병풍(申師任堂草書屛風)인데, 19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윤종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은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신사임당이 절묘한 경지의 예술 세계에 머문 중요한 동기는 환경이었다. 즉 첫째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사임당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 먼저 혼인 전 환경을 보면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 신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 생활과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신사임당은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신사임당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신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자가 출가한 뒤에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한 유교적 규범 속에서도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신사임당의 예술 속에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사임당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었다. 신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신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芑)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원년)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자녀들 중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이(李珥)이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는데, 이이는 여기에서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신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신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1550년(명종 5) 이원수는 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라 한강의 수운을 담당하는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봄에 삼청동(三淸洞)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에 이원수는 이선과 이이 두 아들과 함께 조운(漕運)의 일로 평안도로 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병이 난 신사임당은 음력 5월 17일 새벽에 사망했다. 이이의 〈선비행장〉에는 그날 관서 지방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서강(西江)에 도착했는데, 신사임당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기 전에 행장에 있던 유기그릇이 모두 빨갛게 변하는 괴이한 일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사임당은 죽은 뒤에 파주 두문리(斗文里)의 자운산(紫雲山)에 매장되었다. 현재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뒤편에 있는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는 율곡 이이의 묘역 아래에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합장묘가 있다.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은 자운서원 등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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