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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16대 왕 - 인조

by 무님 202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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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른바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난 왕은 노산군(뒤에 단종), 연산군, 광해군 등 세 명이었다. 이 가운데 ‘반정()’ 즉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이 교체된 것은 연산군을 폐한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한 인조반정이다. 그런데 반정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왕위에 오른 과정을 보면 중종과 인조(, 1595~1649, 재위 기간 1623~1649)는 아주 달랐다. 중종이 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의 추대로 갑자기 왕위에 올랐다면, 인조는 왕이 되고자 몸소 정변을 준비하고 앞장선 인물이다.

 

인조는 자 화백(). 호 송창(). 휘 종()이다.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으로 ), 어머니는 인헌왕후()이다. 비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 계비()는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에 봉해졌다가 후에 능양군()으로 진봉되었다.

 

조선 16대 왕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 뒤에 으로 추존됨)과 좌찬성 구사맹의 딸(뒤에 인헌왕후로 추존) 사이에서 맏아들로 1595년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인조가 해주에서 출생한 것은 왜구의 침입으로 왕족들이 해주에 피신 중이었기 때문이다.인조의 조부가 되는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늙어서 얻은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조의 친부인 정원군은 광해군의 견제를 상당히 받았다.

후궁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원군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자식으로는 인조(능양군) 외에도 능원대군 보, 능창대군 전, 능풍군 명이 있었다. 아들 덕분에 죽어서 왕으로까지 추존된 정원군은 생전에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아들인 능창군이 모반죄로 모함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자, 그 뒤로 몸과 맘이 상하여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죽음은 후일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623년 김류()·김자점()·이귀()·이괄() 등 서인(西)의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으므로,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자 형제의 의()를 맺었는데, 이것을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정이 은연중 친명적() 태도를 취하게 되자,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에 항복, 군신()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의 내란·외침으로 국가의 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되었는데도 집권당인 서인은 공서(西)·청서(西)로 분열되어 싸웠고, 김자점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이이()·이원익()이 주장한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여진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경지대인 중강()·회령()·경흥() 등지에 개시()하여 그들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였다.
1628년 벨테브레이(Weltevree:) 등의 표착()으로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또 정두원()과 소현세자를 통하여 서양의 문물에 접하게 되었다. 1634년 양전(:토지조사)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시정하였으며, 연등9분()의 법을 정비하여 세제()를 합리화하였다. 1645년 볼모생활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으며,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수어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하였다. 한편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송준길()·김육()·김집()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인조는 백성에게 사랑을 얻지 못한 왕이였다. 광해군의 패륜행위와 실정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인조 반정의 실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인조 개인으로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왕위 찬탈로까지 이어진 것이고 그를 도운 서인 세력은 대북 일당독재로 권력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을 믿어 줄 어리석은 백성은 없었다. 당시 여론은 이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이 서울에 입성할 때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서울을 떠나던 날, 그를 따르던 백성은 하나도 없었고 한강변에서 배를 타려 했을 때 백성들은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다.

파죽지세였던 이괄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인조는 여전히 왕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던 그의 처지는 늘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인조와 그를 추대한 공신들은 사림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했다. 겉으로는 효심에 찬 행동이었지만, 실제는 종법()적 정통성이 만들어 약했던 권력 기반을 다져볼 목적이 더 컸다.

 

또한 자식에게도 매정한 아버지가 아니였나 싶다.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며 성공한 인조반정이었지만, 인조의 치세를 보면 그의 왕위등극과 함께 백성의 고난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인조 또한 마음 편히 왕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정통성 문제로 고민을 겪었고, 병자호란 뒤에는 청국의 요구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게 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8여 년의 인질생활을 끝으로 소현세자가 귀국했지만 인조는 냉담하게 대했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돌연사한 소현세자에 대해 사인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은 아직까지도 불씨처럼 남아 있지만, 그가 설사 죽지 않고 살았다 해도 인조는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주 장릉 인조의 묘

 

인조의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조선후기 제16대 인조와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인 왕릉·왕비릉가 있으며 사적이다. 처음 인열왕후 상() 때 능의 터로 파주시 북운천리로 정하고 인조도 이 곳에 장사하였는데, 1731년(영조 7) 사갈(: 뱀과 전갈 등 사람이 몹시 싫어하는 동물)이 낭자하게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 현위치로 옮겨 합장하였다. 석물은 봉분 아래 병석()을 두르고 밖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능 앞에 석상 2좌를 배치하여 2위()임을 표시하였다. 합장 때 옛 능의 석물을 옮겨다 썼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 1원,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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