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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인조시대 정묘왜란이 일어나다

by 무님 2020.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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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 때인 1627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여 벌어진 전쟁이다. 후금은 광해군 폐위 문제를 구실로 쳐들어왔다가 조선과 협상을 벌인 뒤 강화를 맺고 돌아갔다. 두 나라는 이 전쟁을 계기로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고 9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 전개도

 

병자호란의 배경을 살펴보면 광해군때부터 살펴봐야 한다.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를 요동경략()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강홍립()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 향배()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전투()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설진()해 요동 수복을 꾀하는 거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별다른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려 이를 조선과의 통교()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여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의 주력 부대는 용천·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로 패주하였다.

후금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을 모집하였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이 유도대장()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 사이 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특히 정봉수()·이립()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상국인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조선과 후금의 화약은 두 나라가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더욱이 막대한 세폐()와 수시로 강요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에 반발, 배금의 길을 굳히게 되었다. 후금 역시 세폐와 중강()의 개시()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공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강압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악화일로를 걷게 되어 결국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이 맺은 강화의 조건은 두 나라에 모두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조선은 오랑캐라고 여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은 것을 굴욕적으로 생각했고, 후금은 조선이 명과 계속 가깝게 지내는 것이 불안했다.

강화 이후 조선과 후금은 조공 문제 때문에 갈등을 일으켰다. 조선은 처음에는 후금의 요구대로 조공을 주었으나, 후금이 차츰 엄청난 양의 조공을 요구하자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후금은 명과의 전쟁에서 우세해지자 조선에게 군신 관계를 맺은 뒤 황제국으로 받들라고 요구했다. 즉, 이전에는 형제 관계였으나 앞으로는 신하가 되어 후금을 임금으로 모시라는 뜻이었다.

여전히 후금을 경계하던 조선은 즉시 이를 거부했다. 두 나라의 관계는 한층 나빠졌고, 결국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친 후금이 1636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조선에 쳐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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