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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백사 이항복 '오성과 한음'

by 무님 2020.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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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 이항복(, 1556∼1618)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조선시대에서도 특히 친숙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오성과 한음’이라고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부연이 필요 없겠지만 ‘오성()’은 오성부원군 이항복이고 ‘한음()’은 한원부원군 이덕형(, 1561~1613)이다. 서로 다섯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뛰어난 인물이 특히 많이 배출되었던 16세기에도 우뚝한 존재였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고 자는 자상(), 호는 백사()ㆍ동강()이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우참찬(정2품)까지 오른 이몽량()이고 어머니는 현감 최윤(, 본관은 전주)의 딸이다.

이항복은 1556년(명종 11) 10월 15일 서울 서부(西) 양생방(, 지금 남창동ㆍ서소문동ㆍ태평로ㆍ남대문로 일대)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2남이었다.

 

오성 이항복

 

오성부원군()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과의 기지와 작희()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열중했다 한다.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의 아들인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 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 강연()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에 의해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의 『강목』 한 질씩이 하사되고 옥당에 들어갔다. 1583년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 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예조정랑 때 발생한 역모사건에 문사낭청()으로 친국에 참여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료 사이에 비난이나 분쟁이 있을 때 삼사에 출입해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 무마해 덕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한편, 파당을 조성하는 대사간 이발()을 공박하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그 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이듬 해 정철()의 논죄가 있자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해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했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 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 동안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했고 윤승훈()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이 황응양()을 조사차 보냈다. 이에 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이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만주 주둔군 조승훈()·사유()의 3,000 병력이 왔으나 패전하자, 다시 중국에 사신을 보내 대병력으로 구원해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여송()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탈환, 환도하였다. 다음 해 선조가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를 설치해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했을 때 대사마()로서 세자를 받들어 보필하였다.

1594년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해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하였다.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과 양호()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에 올랐다. 이 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가 동료 사신인 경략()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使)가 되어 부사(使) 이정구()와 함께 명나라에 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 뒤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하자, 자신도 함께 휴전에 동조했다고 자진해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방해책() 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602년정인홍()·문경호() 등이 최영경()을 모함, 살해하려 한 장본인이 성혼()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 성혼을 공격하였다. 이에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 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 유생들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구금되어 권당(: 동맹휴학)하는 사태가 생기자, 그가 겨우 광해군을 설득, 무마해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다.

곧이어 북인 세력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 일가의 멸문,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의 살해 등 흉계를 자행하자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해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별장 동강정사()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이 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 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가 서궁(西: 경운궁. 곧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 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죽은 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며 1659년(효종 10)에는 화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1746년(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을 보내 영당()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직에 등용시키는 은전이 있었다. 1832년(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 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의 요청으로 봉사손()의 관리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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