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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농민의 반란 < 홍경래의 난 >

by 무님 2020.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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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순조 11) 홍경래·우군칙()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다.

 

홍경래의  본관은 남양(). 용강() 출신. 외숙 유학권()에게 학문을 배웠고,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낙방했으나 과거를 치를 만큼 경서에 대한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지녔다. 그와 함께 병서()나 제반 술서(), 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하였다. 과거에 낙방한 뒤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다. 당시 과거제도의 부패상,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가산에서 풍수로 부호의 집을 드나들던 우군칙()을 만나 뜻이 통하자 반란을 모의하였다.

 

홍경래의 난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다. 조선 후기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

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지주와는 다른 서민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선된 농업 생산기술과 시장의 확대라는 유리한 여건 속에서 차경지()의 확대를 통해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부농이 성장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영세빈농·전호()가 되었다.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이 시기 농민층 분해는 다수의 소농민들을 중세사회의 특징인 토지에 대한 긴박을 해체시켜 임노동자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부농·서민지주로 양극 분해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상공업은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가 이루어지고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개성상인이나 의주상인들은 대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등 상권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구조에도 부()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의 증가와 평민·천민의 감소, 몰락양반의 다수 존재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동요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1812년 1월 31일(1811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까지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홍경래 난의 지도층에는 총지휘를 맡은 홍경래, 부원수로 불린 김사용, 광산을 경영하며 농민군 조직을 담당한 우군칙, 이념 지도를 담당한 김창시, 대상인으로서 물자 조달을 맡은 이희저 등이 있었다. 우군칙은 서자 출신으로 풍수와 점에 능했으며 학식도 높았고 이희저는 역졸이었으나 상인이 되어 가재를 불린 가산에서 이름난 대부호였으며 김창시는 사회 비판적 시각을 지닌 진사 출신의 문장가, 재예가였다. 이들은 가산군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아 광산 노동자 모집을 구실로 군사를 모아 훈련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힘을 잘 쓰는 역사(力士)들인 홍총각, 양시위, 김운용, 이제초 등도 가담하였다. 조선시대에 완전히 하급 무관 양성소 취급을 했던 서북 출신답게 홍경래, 김사용 등 지도부는 상당히 전투적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모사로 취급받는 우군칙마저 칼 빼드는 모습이 기록에 남아있다. 지도부에서 완전한 문관은 진사 출신 김창시 정도다. 여기에 더해서 역사 출신들은 농민층과의 연결고리로서도 그리고 일선 지휘관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야말로 서북 지방민들은 전투민족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10년에 걸쳐 들키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들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불과 열흘만에 청천강 이북의 등을 장악하였다. 이는 홍경래의 난이 보통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반적인 농민 봉기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잘 보여주며, 치밀한 계획하에 정부 전복의 목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런 난의 파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홍경래가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우군칙이 총참모, 김창시가 참모,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000명 정도의 봉기군 중 대다수인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 없는 농민이나 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선봉대를 맡은 홍경래는 단숨에 가산·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이듬해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그래서 홍경래 군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한때는 진짜로 격문에 나온 5,000여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반란이 진행된 이유는, 향임들과 상인 등 여러 세력이 홍경래의 난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성문을 내부에서 열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곧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추격을 받은 농민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전세가 이와 같이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주력부대가 지닌 취약성 때문이었다. 농민군은 비록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으로 대표되는 봉건 지배층에 대한 공동의 이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부인 부농·상인층과 일반 병졸을 구성하는 소농·빈농·유민·임노동자층이 가지는 상호 대립적 성격으로 인해 이들 하층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에 대해 격문의 내용에서는 단지 서북인의 차별대우,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정진인()의 출현 등만을 언급할 뿐 정작 소농·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를 대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휘부가 점령 지역에서 이임()·면임() 등에게 병졸들을 징발하도록 한 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향군()·민병()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이러한 강인한 저항은 곧 주력부대의 구성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정주성의 농민군은 이전의 급가고용이나 소극적 참여자가 아니라 주로 박천·가산 일대의 소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관군의 초토전술에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의 대다수 농민들이 정주성에 퇴각해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관군의 약탈에 피해를 입은 성밖의 농민들의 협조와 또 지휘부에서도 부민()에 대한 가혹한 징발을 통해 평등한 분배를 제공한 때문이었다. 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남정() 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민간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난에서 부농과는 달리 소극적인 구실만을 담당했던 광범한 소농·빈민층은 이후 임술민란()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 홍경래의 난의 기록  < 조선왕조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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