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은 효명세자는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와 순원(純元)왕후 김씨의 맏아들로 1809년(순조 9) 8월 9일에 탄생했다. 3세 때 이름을 영(旲. 원래 발음은 ‘대’지만 ‘영’으로 부르도록 했다)이라고 정하고(1812년 6월 2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7월 6일). 함경도 관찰사 김이영(金履永)은 세자의 휘와 같다는 이유에서 이름을 ‘이양(履陽)’으로 고치기도 했다(8월 21일).
그 뒤 성균관에 입학하고(8세. 1817년 3월 11일) 관례(冠禮- 성년식)를 거행했다(10세. 1819년 3월 20일).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세자의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효명세자는 18세인 1827년 2월 부왕 순조의 건강 악화를 이유로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었다. 뒤에서 보듯이 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청정 1년 전부터는 시작(詩作)보다 경세에 관련된 독서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순조에게서 청정을 미리 통보 받고 대비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미래의 국왕답게 젊은 세자는 의욕적으로 청정을 시작했다. 우선 일련의 인사를 단행해 안동 김씨 계열을 배제하고 새로운 인물을 널리 등용했다. 홍기섭(洪起燮. 예조판서 역임)·김노경(金魯敬. 이조판서 역임) 등이 측근에서 보좌했고, 장인 조만영을 비롯한 조인영(영의정 역임)·조종영(趙鍾永. 우참찬 역임)·조병현(趙秉鉉. 이조판서 역임) 등 풍양 조씨 출신도 비중 있게 활동했다. 김정희·권돈인(權敦仁. 영의정 역임)은 조인영과 친구 사이였고, 이지연(李止淵. 우의정 역임)·이기연(李紀淵. 형조판서 역임) 형제는 조만영과 사돈이었다. 호적법을 정비하고 형옥(刑獄- 형별과 옥사)을 신중하게 한 것은 의미 있는 시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제는 건강이었다. 이전에도 수두(3세. 1812년 10월 18일)와 홍역(13세. 1822년 11월 24일)을 앓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순조롭게 왕자를 낳는 등(1827년 7월 18일 헌종 출생)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였지만, 1830년(순조 30) 윤4월 말에 각혈한 뒤 며칠 만에 승하한 것이다(5월 6일). 왕실 중흥의 기대를 무산시킨 허망한 결과였다.
세자는 ‘효명’이라는 시호를 받은 뒤(1830년 7월 15일) 익종(翼宗)을 거쳐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로 추존되었다. 수릉(綏陵.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소재)에 신정왕후와 합장되어 있다.
* 효명세자의 업적
명세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짧은 생애에도 문학과 예술에서 남다른 성취를 이뤘다는 것이었다. 세자는 [경헌시초(敬軒詩抄)], [학석집(鶴石集)], [담여헌시집(談如軒詩集)], [경헌집(敬軒集)] 등의 여러 문집을 남겼다. 거기에는 시조(9수)와 ‘목멱산(木覓山)’, ‘한강(漢江)’, ‘춘당대(春塘臺)’ 등의 국문 악장을 비롯해 40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시는 연작이 많아 실제 편수는 이것을 훨씬 넘는다.
시는 자연을 감상한 내용이 많은데, 주로 신하들과 그런 내용을 주고받거나 궁궐 내외의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에서 풍광을 읊었다. 또 다른 특징은 누이와의 우애를 그린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명온(明溫)·복온(福溫)·덕온(德溫)공주 등 누이동생만 셋이 있었는데, 그들과 각별한 정을 나눴다. ‘사매씨(思妹氏)’는 그 제목처럼 누이를 그리는 마음이 담뿍 담긴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자연과 누이를 사랑하는 작품이 많다는 사실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짐작케 한다.
좀더 중요한 분야는 연회와 관련된 예술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청정한 3년 동안 해마다 부왕과 모후를 위해 큰 연회를 열었는데, 순조의 존호(尊號-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던 칭호)를 올리는 ‘자경전 진작정례의(慈慶殿進爵整禮儀. 1827)’,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하는 ‘무자진작의(戊子進爵儀. 1828)’, 순조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하는 ‘기축진찬의(己丑進饌儀. 1829)’가 그것이다(궁중 연회는 ‘연향[宴享]’이라고 통칭되는데, 그 규모가 큰 순서대로 진풍정〔進豊呈〕·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으로 나뉜다).
효명세자는 이런 큰 궁중 행사를 직접 관장하면서 상당수의 악장과 가사를 만들었다. 특히 중요하게 평가되는 부분은 궁중 무용인 정재무(呈才舞)를 다수 창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규모와 복식을 더욱 크고 화려하게 설정한 정재무를 여럿 창작했다. 해당 연회의 각종 사항을 자세하게 기록한 의궤(儀軌)에 남아 있는 그런 업적은 그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이렇게 대규모의 궁중 연회를 거행하는 데 주력한 까닭은 효심의 발로와 정치적 포석으로 해석된다. 세자는 유교의 근본인 예악(禮樂)을 중시하는 덕망 있는 군주의 존재를 널리 알려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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