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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사도세자의 방탕생활 3.

by 무님 202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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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영조 37년 4월 동궁의 시종들과 세자빈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안감사 정휘량의 감언에 따라 세자는 평양으로 떠났다. 물론 영조의 윤허도 없이 몰래 떠난 것이었다. 

20일 만에 돌아온 세자에게 동궁의 유선 서지수, 대사성 서명응, 장령 윤재겸 등이 부왕을 만나 요서를 빌라고 건의하였으니 세자는 이들에게 폭언을 퍼붓자 세자의 장인인 우의정 홍봉한이 울면서 건의하였다.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부왕을 만났다. 겉으로는 평양을 다녀온 문제는 수습되는 듯했다. 당시 영조는 여러 후궁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젊고 발랄한 문 숙의도 있었지만 새 중전 김씨에게 한동안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조는 문 숙의의 처소를 찾았다.

이때 숙의 문씨는 영조에게 아양을 떨었다.

"전화, 신첩의 소원은 나라 안의 명승고적을 두루 구경하는 것이옵니다. 마마."

" 그 소원은 허락할 수가 없구나. 나라의 법이 궁중에 있는 사람은 함부로 밖에 나가지 못한는 법이니라."

"전하, 세자마마는 괜찮사옵고 신첩은 불가하다 그 말씀이옵니까?"

"....? 그게 정말이렸다?"

그 일로 세자빈의 아버지 우의정 홍봉한 외 관련자 10여 명 이상이 파직 또는 귀양을 갔다. 많은 관련자가 삭탈관직된 뒤 다시 홍봉한을 영의정으로 승격시켰다.

평양 미행이 잠잠해질 무렵 세자는 동궁 뒤뜰에 토굴을 파고 커다란 뒤주를 만들어 들여놓았다. 세자는 뒤주 안에 들어가 낮잠도 자고 혼자서 그 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토굴은 겨우 방 한 칸과 마루뿐이었지만 세자는 틈 마 나면 이 속에 들어가 앉아 내관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세자가 토굴을 파고 그 속에서 해괴한 행동을 벌인다는 소식에 어느 날 영조는 그곳을 찾아가서 확인했다. 토굴을 낱낱이 살핀 영조는 세자빈 홍씨와 왕세손을 마주했다.

"네 고초를 짐작하겠구나. 어리석은 세자로 인해서 그 얼마나 가슴을 태우는지..."

"황공하옵니다. 아바마마..."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영조의 위로에 세자빈 홍씨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이듬해 1762년 영조 38년 2월 세손빈을 맞아들였다. 후에 세손은 정조 임금이 되고 세손빈은 효의왕후가 될 청풍 김씨 김시묵의 딸로서 세손보다 한살 적은 열 살이었다.

세자도 어느새 28세로 슬하에 여러 여인들로부터 5남 3녀를 두었으나 그의 비뚤어진 성품은 고칠 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욱더 거칠어지기만 하니 세자빈 홍씨는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럴수록 영조와는 더욱 소원해졌고 심지어 자신을 낳은 영빈 이씨까지도 아들인 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세자가 누이동생인 화완옹주를 불러들였다. 마지못해 오기는 하였으나 겁부터 집어먹은 화완옹주에게 여승과 기생들을 소개하고는 춤과 노래와 장구까지 치게 하였다. 게다가 여승에게는 염불까지 외우게 하였다. 

 

영화 <사도>

 

 

1762년 영조 38년 4월 그믐께 영조가 화완옹주에게 세자의 행동에 대해서 묻자 화완옹주는 망설이다가

" 아바마마께 아뢰옵기조차 망국하옵니다. 세자께서 여승과 기생들을 끌어들여..."

"뭣이? 여승과 기생 따위를 끌어들여?"

세자의 기해은 중전이나 숙의 문씨 등은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영조가 세자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숙의 문씨의 처소에 들자 그녀는 갖은 교태를 부리면서 영조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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