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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나경언의 고변

by 무님 202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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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영조 38년 윤 5월 중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내용 외에도 역적모의를 꾀한다고 무고했다. 이는 소론 일파의 재기를 우려한 노론의 발상이었다.

휘녕전에 엎드린 세자는 끝내 역적모의를 부인하자 영조는 요천검을 내려 자결하라고 명했다. 임금과 세자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던 영의정 홍봉한은 파직되고 후임으로 신만이 임명되었다. 신만이 임금에게 자결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자 영조는 살기등등하여 그에게 세자보다 먼저 죽고 싶으냐고 호통쳤다. 마지막으로 임덕재가 죽기를 각오하고 간언 했으나 역시 쫓겨나고 말았다.

 

영화 <사도>

 

덕성합에서 이 살벌한 소식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듣고 있던 세자빈 홍씨는 통곡하였고 세손도 울면서 어머니 홍씨를 위로하였다.

"어마마마, 진정하십시오."

"세손, 아버지께서 목숨이 경각에 처해 계시니 이 일을 어찌해야 좋단 말이오? 으흐흐..."

세손이 영조를 창가서 엎드려 울면서 애소했다.

"할아버님! 아비를 살려 주십시오."

세손은 세자와 같이 죽겠다고 애소하였으나 끝내 그 자리에서 끌려나와 어머니 홍씨를 붙잡고 눈물을 쏟았다.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을 독촉하고 있을 때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등 동궁의 사부 10여 명이 우르르 몰려들어와

세자를 구원하기 위해 머리를 조아렸다. 이때 영의정 신만도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간언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휘녕전 대문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영빈 이씨가 전한 글을 읽은 영조는 바로 찢어 버렸는데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무슨 밀고인 것은 분명했다. 임금은 즉시

"여봐라, 즉시 동궁의 굴 속에 있는 뒤주를 이곳으로 옮겨 오너라."

뒤주는 세자가 만든 것이었다. 세자가 그 속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였고 마음이 울적할 때면 그 속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하였던 그 뒤주였다.

세자는 끝내 부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음을 깨닫자 마지막으로 부왕 영조에게 절하고 귀주 속으로 곧장 들어갔다. 마침내 뒤주 뚜껑이에 큰 못이 박혔다. 그 위에 풀을 덮고 큰 돌까지 눌러 놓았다. 세자는 뒤주 속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몸부림쳤다.

도승지 이이장이 세자를 위해 간언 하다가 참수당했으므로 누구 한 사람 세자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한낮이 되자 뒤주 안은 찌는 듯이 더웠다. 세자는 이따금 가냘픈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때 세자빈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세자의 죽음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영의정 김상로도 세자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이제 세자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손과 세자빈 홍씨는 눈물만 쏟았다.

임금도 가슴이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영조는 또 영을 내렸다.

"여봐라, 무감! 세자의 비행 10조를 적어 응징해야 한다고 상소문을 올린 나경언을 끌고 오너라."

나경언은 형조판서 윤급과 판부사 조재호, 응교 이미 등이 사주에 의해서 올린 상소문이라면서 살려 달라고 애걸했으나 곧장 처형되었다.

세자가 뒤주 속에 갇힌 지 8일 만에 뚜껑을 열었다. 숨이 멎어 있는 세자의 앞가슴은 얼마나 쥐어뜯었는지 살갗이 모두 헤어져 유혈이 낭자하였고 이마의 피는 말라서 변색이 되어 있는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다. 그때 그는 28세였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동궁의 허물을 아뢴 나경언을 친국하고 복주하다

나경언(羅景彦)이 복주(伏誅)되었다. 나경언 이란 자는 액정 별감(掖庭別監) 나상언(羅尙彦)의 형이니,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가산(家産)이 탕패되어 자립(自立)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춘궁(春宮) 을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려, 환시(宦侍)가 장차 불궤(不軌)한 모의를 한다고 고하였다. 참의 이해중(李海重)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달려가 고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청대(請對)하여 계품하지 않을 수 없다."

하매, 이해중이 이에 세 차례나 청대하였다. 임금의 마음이 놀라 이해중의 입시를 명하니, 이해중이 드디어 그 글을 아뢰었다. 임금이 상(床)을 치면서 크게 놀라 말하기를,

"변란이 주액(肘腋)에서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친국(親鞫)하겠다."

하였다. 경기 감사 홍계희(洪啓禧)가 마침 입시하고 있다가 임금에게 호위(護衛)하게 하기를 권하니, 임금이 이에 성문 및 아래 대궐의 여러 문을 닫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즉시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국청(鞫廳)을 설치하니, 시임 대신 홍봉한·윤동도와 원임 대신 신만(申晩) 등이 입시하였다. 남태제(南泰齊)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아 판의금(判義禁) 한익모(韓翼謨)·동의금(同義禁) 윤득양(尹得養), 문랑(問郞) 홍낙순(洪樂純) 등 8인과 함께 죄인을 국문하였다. 나경언이 옷솔기에서 흉서(凶書)를 내놓으면서 말하기를,

"이 글을 구중(九重)의 천폐(天陛)에 올리고자 했으나 올릴 길이 없기 때문에 우선 형조에 원서(原書)를 올려 계제(階梯)를 삼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 읽지 못하고서 손으로 문미(門楣)를 치면서 말하기를,

"이런 변이 있을 줄 염려하였었다."

하고, 그 글을 영의정에게 주어 보도록 했다. 홍봉한이 울면서 보고는 말하기를,

"신이 청컨대 먼저 죽고자 합니다."

하였고, 윤동도가 나아가 말하기를,

"신 역시 보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또한 보라."

하였다. 윤동도가 보기를 마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元良)의 과실을 알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하였다. 대개 나경언이 동궁(東宮)의 허물 10여 조(條)를 낱낱이 들었는데 말이 매우 패란(悖亂)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 글을 두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청컨대 불태우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 한익모가 나아가 말하기를,

"친국할 때에 금오랑(金吾郞)이 철저히 조사하지 않아서 이런 흉서를 장전(帳殿)으로 들어오게 했으니, 도태하고 잡아다 처리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동도가 말하기를,

"국청의 체면은 마땅히 판금오의 말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고만 하고 도태하지는 말며, 한익모 역시 중추(重推)하라."

하였다. 임금이 춘방(春坊)에 하교하여 준절히 책망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동궁께서 평소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증세가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반드시 편안히 있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이유수(李惟秀)와 함께 가서 성교를 전하고, 또 진정하게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홍봉한이 급히 창덕궁(昌德宮)으로 나아가 세자에게 보고하매, 세자가 크게 놀라 보련(步輦)을 타고 대궐로 나오니 이때가 바야흐로 2경(更)이었는데,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엎드려 대죄(待罪)하였다. 임금이 이에 문랑(問郞)으로 하여금 죄인에게 묻기를,

"네가 나라를 위해 이처럼 진달하였으니, 그 정성은 가상하다. 그러나 처음 올린 글에 부언(浮言)을 만들어 사람을 악역(惡逆)의 죄과로 모함하였고, 또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는 등의 말로 임금을 공동(恐動)시켜 궐문을 호위까지 하게 하고 도성이 들끓게 하였으니, 이후 불궤한 무리들이 다시 네 버릇을 본받게 될 것이다."

하고, 이에 엄형하기를 명하였다. 신장(訊杖)을 네 차례를 치고 우선 중지해 문사 낭청으로 하여금 죄인에게 묻게 하기를,

"네 글 가운데 서(徐)·김(金)·이(李) 세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죄인이 공초하기를,

" 서명응(徐命膺)이요, 은 바로 호리(戶吏)의 아들 김유성(金有星)인데, 전년에 정배(定配)되어 물에 빠져 죽었으며, 이(李)는 모릅니다."

하니, 오위 장(五衛將) 조덕상(趙德常)이 말하기를,

"김유성은 본래 물에 빠져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작년 진주(晉州)에서 돌아올 때에 보았습니다."

하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국청은 체모가 지극히 엄한데, 한낱 위장(衛將)이 어찌 감히 잡스런 말을 하는가? 이는 스스로 공을 세우려는 뜻이다."

하고, 빨리 남해(南海)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인의 글 가운데 이르기를 김시찬(金時粲)·이보관(李普觀)이 상서하여 극진히 간쟁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서본(書本)을 가져오라."

하였다. 임금이 다 읽고 나서 말하기를,

"역시 대단치 않다."

하였다. 임금이 동궁의 입시를 명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동궁을 죄인과 같은 뜰에 있게 해서는 안되니, 마땅히 죄인을 내보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한참 후에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홍봉한이 나와서 아뢰기를,

"대조(大朝)께 충성하는 자는 소조(小朝)에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나경언의 불충(不忠)은 이미 논할 것도 없으니, 마땅히 해당되는 율로 논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홍봉한의 파직을 명하였는데, 윤동도가 구해(救解)하매, 이에 다시 영상(領相)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죄인을 용서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굳이 가형(加刑)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부득이 이에 하교하기를,

"네가 이미 여러 신하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였으니, 그 정성이 비길 바가 없다. 그러나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했으니 죄 역시 가볍지 않다."

하고, 형장(刑杖) 6도(度)를 시행하라고 명하니, 나경언이 ‘동궁을 무함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공초하였다. 임금이 그래도 살리고자 하니,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나경언은 하찮은 사람으로서 이미 ‘동궁을 무함하였다.[誣陷東宮]’라는 공초가 나왔으니, 전하께서 온전히 살려주어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고, 문랑(問郞) 홍낙순(洪樂純) 역시 같은 말로 청하였다. 윤동도가 말하기를,

"참으로 두 사람의 말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부득이 허락하였다. 남태제 등이 율관(律官) 전상우(田相雨)로 하여금 부대시 처참(不待時處斬)으로 조율(照律)하여 아뢰었다. 대사간 이심원(李心源)·장령 이지회(李之晦)가 죄인에게 노륙(孥戮)의 율로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매우 꾸짖기를,

"이심원은 일찍이 춘방(春坊)을 역임했는데 어찌 얼굴이 부끄럽지 않은가? 파직하고, 이지회는 체차하라."

하였다. 판의금 한익모가 아뢰기를,

"죄인을 이미 결안(結案)하였으니, 청컨대 사주(使嗾)한 사람을 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한익모의 파직을 명하였다. 제일 늦게 판부사 정휘량(鄭翬良)이 들어와 말하기를,

"신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야 들어왔습니다. 이런 흉인을 어찌 일각이라도 머물러 두겠습니까? 빨리 참형에 처하라고 명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17장 B면
  • 【국편영인본】 44책 9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인사-임면(任免) / 변란-정변(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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