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2년 영조 28년 3월 영조와 세자 부자 간이 계속 반목하던 중에 세 살 된 세손이 죽었다. 임금은 세자 선은 의중에 두지 않았고 오직 왕세손에게 온갖 기대를 걸었는데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났다.
이 해 9월 세자빈 홍씨가 두 번째 왕손을 낳았으니 뒤에 22대 왕 정조가 되는 세손이었다.
영조와 세작 간에 갈등이 계속되자 영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환수했다. 세자는 멍에를 벗어 버린 듯 홀가분했고 한편 허전하기도 했다. 그때 만난 여인이 16세의 나인 임씨였다. 세자는 임씨에게 욕망을 불태웠다. 세자로서는 세자빈 외에 처음으로 접촉하는 여인이었다. 승휘 임씨는 그 뒤 숙빈으로 봉함을 받았고 뒤에 두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녀가 낳은 은언군 인과 은신군 진, 두 왕자 중 은언군은 청종의 조부가 되고 은신군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조부가 된다.
그들은 모두 정조의 이복동생들이다.
세자는 드 뒤부터 점점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영조가 금주령을 내린 것을 알면서도 매일 술을 마시며 나인들을 함부로 다루었다. 세자의 횡포를 전해 들은 영조는 그를 아예 자식으로 생각지 않으려 했다. 이때 정성왕후가 영조에게 여러 차례 간했으나 영조는 세자가 싫었다.
1757년 영조 33년 정월 세자가 함부로 나인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온 궁중에 파다하게 번졌다. 어릴 때부터 옷 투정이 심했던 세자는 그 날도 의대 나인들에게 트집을 잡고는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나는 너희들에게까지 능멸당하고 싶지 않다.!"
세자는 호통과 함께 긴 칼을 뽑아 들고 의대 나인 세 명을 무참히 죽였다. 또다시 세자가 의대 나인을 살해했다는 전갈이 영조의 귀에 들려온 것이다. 화가 극도로 오른 영조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무감들에게 세자를 포박하여 끌고 오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때 마침 이 소식을 들은 중전이 허겁지겁 대전에 들어왔다.
"마마, 내버려 두시옵소서, 제발.... 신첩의 간절한 소원이옵니다. 제발..."
중전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화급해지자 세자를 잡아들이라는 어명은 사라져 버리고 중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었다.
1757년 영조 33년 2월 정성왕후 서씨는 소생 없이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예감한 정성왕후는 영조와 세자에게 사이좋게 지내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영조와 세자는 끝내 견원지간이 되고 말았다. 정성왕후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 능역의 홍릉에 묻혔다.
영조는 세자와는 반목하였으나 세손 산은 끔찍이 사랑하였다. 임금과 사이가 좋지 않은 세자는 소외감으로 자주 대궐 밖으로 미행하였는데 이때마다 세자빈 홍씨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는 몰래 온양 온천을 다녀온 뒤에도 부왕께 문안 인사도 드리지 않아 세자빈에게 걱정을 안겨 주었다. 세자는 날이 갈수록 미행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옷을 갈아입으려면 으레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곤 하였다. 이때에 세자의 총애를 받았던 나인 빙애가 시중을 들다가 맞아 죽었다. 억울하게 죽은 빙애에게는 세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네 살 된 은전군과 딸이 있었는데 이 일로 대궐 안에서는 또 한번 큰 풍파가 일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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