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는 정치하는 사람들 간에 서로 무리를 지으며 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정치 무리를 ‘붕당’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붕당에 속한 사람들도 다른 편을 서로 인정해 주며 사이좋게 정치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상대 당에 대한 올바른 비판은 사라지고, 점차 모함이나 부정적인 비판으로 바뀌면서 붕당 간의 정치적 싸움이 치열해지기 시작하게 된다. 영조 임금은 신하들끼리 편을 갈라 자기들만의 이익을 좇는 상황이 왕권을 약하게 만들고 조선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붕당 간의 싸움을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을 실시하기로 한다.
그 정책이 바로 '탕평책'이다.
탕평책은 영조가 서로 다른 무리의 신하들이 골고루 벼슬을 할 수 있도록 인재를 고르게 등용한 정책이었다.
영조는 세제 때부터 탕평책을 구상했다. 탕평은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없고, 무리 짓는 것이 없고, 왕의 뜻에 따라 탕탕평평’한 상태를 뜻한다. 탕평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탕평채라는 음식을 만들기까지 한다. 다양한 색깔이 나는 재료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하나의 음식이 되는 것처럼 당들이 탕평책으로 조화를 이루라는 것이였다.
영조는 강력한 왕권만이 붕당 사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를 위해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조정하는 한편, 일련의 군제 개혁과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강력한 왕권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리고 영조는 정국을 자신을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주도하게 만든다. 이름하여 탕평파이다.
탕평채라는 음식명은 영조 때 여러 당파가 잘 협력하자는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에 처음 등장한 음식에서 유래한다.
탕평채는 녹두묵에 고기볶음, 미나리, 김 등을 섞어 만든 묵무침을 말하는데, 봄, 가을철에 입맛을 돋워주는 음식으로, 두견화전, 화면, 진달래 화채, 향애단(쑥경단)과 함께 삼짇날의 절식이기도 하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탕평채라는 음식 이름은 조선 영조가 탕평책의 경륜을 펴는 자리에 처음으로 올린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영조는 1724년 즉위하자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의 필요를 역설하는 교서(敎書)를 내려 탕평 정책을 펴기로 했다. 이 정책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호조참의(戶曹參議) 이병태(李秉泰), 설서(說書) 유최기(兪最基)는 파면했다. 그러고는 노론의 홍치중(洪致中)을 영의정, 소론의 조문명(趙文命)을 우의정에 임명해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의 의지를 나타냈다. 일반 유생(儒生)들에게는 당론과 관련된 상소는 올리지도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쟁이 가라앉지 않자 영조는 1762년 소론과 가까이하려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직접 가두어 죽이는 악수를 둔다. 아들까지 죽인 영조는 당쟁을 바로잡으려고 당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는데 그 대책을 내놓는 자리에 바로 탕평채(蕩平菜)를 내놓았다.
탕평이란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왕도탕탕(王道蕩蕩) 왕도평평(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왕은 자기와 가깝다고 쓰고 멀다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재등용 원칙이다. 그래서 그가 만든 탕평채에는 북인(北人)은 검은색이니 석이나 김 가루를 고명으로 쓰고, 동인(東人)은 푸른색이니 미나리를 쓰고, 남인(南人)은 붉은색이니 쇠고기를 볶아서 넣었다. 주재료인 청포는 흰색으로 서인(西人)을 상징했다.
이 어휘의 생성 시기는 정조,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동국세시기』를 편찬한 1849년으로 잡는다. 서문을 쓴 이자유(李子有)가 날짜를 1849년(헌종 15년) 9월 13일이라고 적은 데 따른 것이다. 한편 영조가 탕평채를 내놓은 시기는 1762년경으로 볼 수는 있으나 정확한 고증이 없어 일단 이 기록을 유예한다.
영조는 가혹한 형벌을 없애 압슬형, 낙형, 자자형, 부관참시, 전도주뢰형과 같은 고문을 없앴으며, 균역법을 실시해 조세 제도의 모순을 개혁했고 서원의 중복 설립 금지, 청계천 준설, 서얼 차별 완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통치 기간 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완전히 수습되고 안정을 되찾았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죄를 엄히 물었다.
영조 때 동아시아는 평화로웠다. 청나라는 옹정제의 완벽한 내치, 이를 물려받은 건륭제의 준가리아 복속으로 최대 판도를 자랑했고 상공업이 발달해 조공 무역도 본궤도에 올랐다. 일본 역시 에도 막부 치하의 안정기로 도쿄 인구는 현재 추산 100만을 넘는다는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아직 산업 혁명 초입에 불과한 서방 역시 아직 인도 동쪽까지는 본격적으로 손을 뻗지 못했지만 청나라와의 교역으로 문명의 이기를 동쪽에 보내고 있었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영조는 청나라와의 교류를 늘렸고, 조공 사신들을 통해 서방의 문명을 조금씩 들여오고 있었다. 영조 역시 안경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담배 등의 상품 작물이나, 고구마나 참마 등 구황 작물이 널리 재배됐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술 만드느라 곡물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십 년간 금주령을 내렸다. 숙종 때 강화된 오가작통법을 엄히 지켜 백성의 유민화를 막고 조세 수입의 안정화를 꾀했다.
또한 양역변통론을 통해 균역법 시행에 앞장섰으며, 청계천 준천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참고로 이 두 가지 업적과 탕평을 영조 스스로가 만년에 자신의 치적이라 내세운 세 가지 업적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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