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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단종, 세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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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람 - 조선전기 의정부우찬성, 좌찬성,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 호는 소한당(). 검교정승 권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사() 권근(), 아버지는 우찬성 권제(), 어머니는 판사재감사() 이준()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기책()이 많았다. 책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한명회와 서로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의 교우는 관포()와 같았다. 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에 향시와 회시()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고, 전시(殿)에서 4등이 되었다. 그러나 장원인 김의정()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장원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 『진설())』을 편찬하는 데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수양대군과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권력은 김종서()·황보인() 등 대신들의 손에 들어가고 안평대군()이 대신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워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수양대군이 동지를 규합하고 있을 때,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게 접근해 집권을 모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양정()·홍달손()·유수()·유하() 등 무사들을 규합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김종서·황보인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에 특진되었다. 1454년 2월에 우부승지, 8월에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6월에 이조참판에 발탁되고, 이어 9월에는 좌익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3월에 역신()들이 가졌던 연안·전주·충주·양주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해 7월에 집현전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를 겸하고, 길창군()에 봉해졌다.

1457년 2월 난신()들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3월에는 김문기()·장귀남()·성승() 등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8월에는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 1458년 5월 신숙주() 등과 『국조보감()』을 편찬하고, 그해 12월 의정부우찬성에 승진했다. 1459년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 5월 좌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63년 9월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책임을 맡았다. 1464년 신병으로 감악산신() 설인귀()에 치성을 드릴 때, 비바람이 몰아치자 "당신(설인귀)과 나는 세력이 서로 같은데 어찌해 이와 같이 몰아치는가." 하고 호통했다고 한다.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명신()을 숭배해 사람들의 의아심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활을 잘 쏘고 문장에 뛰어났으나,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고적을 떠돌아다녔다. 이는 아버지가 첩에 혹해 정처를 소박한 데 대한 불만이었다고 한다. 세조를 도와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덕으로 만년에는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남산 아래에 화려한 집을 소유하기도 했다.

시문집으로 『소한당집()』이 있고, 할아버지가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는 역사의식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조 때 『동국통감』의 편찬방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평()이다.

 

 

 

 

2. 권자신 - 조선전기 좌부승지, 우승지,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권백종()이고, 아버지는 판한성부사 권전()이며, 어머니는 서운관부정 최용()의 딸이다. 문종비인 현덕왕후()의 아우이다.

1454년(단종 2) 좌부승지에 이어 우승지가 되고, 1455년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그해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때에 단종의 외숙부로서 세조의 즉위에 협력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피동적으로 좌익공신() 3등에 책정되었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였으나 김질()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사육신 등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였다. 1699년(숙종 25) 관직이 복구되고 뒤에 영월의 장릉(: 단종의 능)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민()이다.

 

 

3. 김질 - 1422(세종 4)∼1478(성종 9).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가안(), 호는 쌍곡(). 개국공신 김사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승()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이며, 어머니는 이양직()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정창손()의 딸이다.

세종 말년에 문음()으로 충의위()에 속해 있다가 부사가 되었을 때, 성균관에서 수학하기를 청해 허락받았다. 성균관에서 참상관의 수학 제도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추장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주부(簿)에 임명된 이후, 우정언()·병조좌랑을 거쳐 1455년(세조 1)에 사예()에 이르렀다.

이 무렵 성삼문()·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와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는 모임을 몇 차례 가지던 중 위험을 느끼자, 1456년 장인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해 이른바 사육신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뒤 세조의 철저한 신임을 받아 좌익공신() 3등에 추봉되고 판군기감사에 승진되었다. 이어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를 거쳐, 1459년 병조참판으로서 세조의 국방 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두 차례에 걸친 세조의 서쪽지방 순행을 위해 황해도·평안도도순찰사가 되고, 1461년평안도의 도관찰사가 되었다. 1463년에 공조판서에 오른 뒤 병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466년 우참찬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468년(예종 즉위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 좌의정에 승진된 뒤 영의정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함께 이른바 원상(: 어린 왕을 보필하기 위한 원로로 구성된 재상권 이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하)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원상 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 서무를 주관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큰 구성군()이준()을 제거해, 1471년 좌리공신() 2등으로 상락부원군()에 봉해졌다.

1474년에는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어 주문사(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 개편에 깊이 관여했으며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65년에 병전()을 고열()하고, 1470년에는 이전()의 교정도 맡았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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