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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사도세자, 운명의 그날 < 임호사화 >

by 무님 2020.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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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사화는 1762년(영조 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영화 <사도>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만든 사건이다. 임오화변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비상식적인 재난, 변괴를 뜻하는 '화변'으로 명명되었다. 영조 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령했고,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윤 5월 13일 영조는 창덕궁에서 갑자기 사도세자를 불러내었다. 이에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원들과 세자와 동궁을 호위하는 익위사 관원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사도세자도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아내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학질(말라리아)에 걸렸으니 세손(정조)의 휘항을 달라"고 하며 그것을 쓰고 영조에게 자신이 병이 있음을 어필하려 했지만, 혜경궁은 "작은 세손의 것을 어찌 쓰겠냐"며 세자의 것을 가져왔다.

영조는 세자를 데리고 경화문을 지나 숙종의 위패가 모셔진 선원전으로 갔다. 당시 영조는 평소에 만안문으로 자주 다녔고 흉한 일을 할 때만 경화문을 썼는데, 세자를 데리고 굳이 경화문을 통과했다는 것은 흉한 일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영조는 창덕궁 선원전에서 절을 올린 뒤 다시 세자와 창경궁 휘령전으로 간 뒤 휘령전에 있던 정성왕후 서씨의 신위에 영조가 행례를 하고 사도세자가 사배례를 한다. 그 직후 영조는 갑자기 손뼉을 치고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군사들을 시켜서 4겹, 5겹으로 전문을 막고 총관을 시켜 군사들을 배열하여 칼을 뽑고 궁의 담을 겨누게 했다. 영조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자 영의정 신만만이 겨우 들어왔을 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제가 죄는 많지만 죽을 죄는 무엇입니까?"라고 하기도 하고, 한중록에 따르면 "아버님,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글도 잘 읽고 말씀도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러지 마소서!"라고 애걸했지만 영조는 요지부동이어서 세자에게 자결을 강요했고 견디다 못한 세자는 자결을 시도한다. 하지만 춘방의 신하들이 달려와서 이를 막은다음 영조한테 세자를 용서해 달라고 간언한다. 영조는 세자의 자결 시도가 춘방의 신하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자 크게 화를 내며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군병들을 시켜서 세자를 변호하는 춘방의 신하들을 내쫓았고 임덕제에게 "세자가 폐해졌는데 사관이 왜 있는가?"라며 역시 붙들어 내보냈다. 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대마저 나가면 난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인가?"하고 울부짖었고 임덕제도 나갈 수 없다고 버티면서 끝까지 세자를 변호했으나 영조의 명이 서슬퍼런지라 결국 끌려나갔고 이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자는 춘방의 신하들에게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물었고, 사서 임성이 "처분을 기다리시라"라고 대답했다. 세자는 곡하면서 엎드려서 개과천선할 것을 호소했지만, 영조는 세자를 죽여야 한다는 영빈 이씨의 말을 옮기면서 세자를 죽여야 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도승지 이이장이 "어찌 여인의 말을 듣고 국본을 해치려 하십니까?"라고 항의했고 영조는 격노하여 도승지를 방형하라 했다가 곧 취소했다. 그외에도 한림 윤숙(尹塾)이 홍봉한을 면전에서 비난하고 울부짖은 일로 다음날 해남으로 귀양을 간다.
이어서 영조는 세자를 깊이 가두었다. 세자를 가둘 뒤주는 밧소주방에서 가져왔고, 뒤주에 가두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후술할 혜경궁의 기록으로 보아 세자는 큰 저항없이 들어간 것 같다. 혜경궁은 세자가 '대 처분'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안절부절못하다 오후 3시에 밧소주방의 뒤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칼로 두차례나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칼을 빼앗아 실패했다. 혜경궁은 세자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으나 들어가진 못하고 사도세자가 울부짖는 소리만 들으면서 "그리 힘도 세신 분이 어째서 뒤주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단 말인가?"하고 울었다.

이후 혜경궁은 내시를 시켜서 영조에게 죄인의 아내가 어찌 궁에 있겠냐고 친정으로 갈 것을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세손을 지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잠시 후에 혜경궁의 오빠 홍낙인이 혜경궁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동궁을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하니, 빈궁도 더 이상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라. 위에서 본집으로 나가라 하시니 가마가 들어오면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그것을 타고 나가시리이다."라고 했고 혜경궁도 통곡했다.
영조는 세손과 혜경궁을 홍봉한의 집으로 보낼 것을 조치한 다음에 밤이 반이나 지난 시점에서 사도세자의 폐위를 선포하는 전교를 내렸으나 사관들이 감히 아무도 그 내용을 기록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들 세자를 며칠 있으면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는지 감시가 엄격하지 않았다. 세자는 갇힌 지 얼마 안 되어 뒤주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다가 영조가 꾸짖을 것을 두려워하여 뒤주로 돌아갔고, 궁인들이 세자에게 제호탕을 주기도 했으며 부채와 음식도 제공되었으나, 이를 안 영조가 격노한 뒤 뒤주는 꽁꽁 묶였으며 그 위에는 풀이 덮였다고 한다. <대천록>에선 이를 홍인한이 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며, <임오일기>에선 뒤주 위에 큰 돌을 올렸다고 한다.
영조는 포도대장 구선복을 시켜서 뒤주를 지키게 했고 세자의 생사 여부를 알기 위해서 말을 걸게 했다. 세자가 누군지를 묻자 구선복이 자신의 이름만을 말했고 세자는 어찌 직함은 말하지 않느냐고 꾸짖어 구선복은 그제야 자신의 직함까지 말했다. 일설에 따르면 구선복과 병사들은 뒤주 옆에서 밥을 먹고 술과 떡을 먹으며 방자하게 굴었고 세자에게 "좀 줄까?" 하고 물으며 놀렸다고 한다. 하지만 설마 아무리 영조가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해도 그들이 세자에게 그렇게 방자하게 행동했을지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둔뒤 뒤주를 둔 창덕궁에서 머무르며 하루에 한번 뒤주를 흔들어 생사를 확인했는데 7일째 되는 날부터 세자가 반응하지 않았다. 이어 세게 흔들자 세자는 희미하게 "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 8일만에 죽었지 실제론 세자는 전날에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고, 시체를 꺼내 확인한 것이 8일째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사도세자는 감시가 엄해지기 전에 받은 부채를 반으로 쪼개 그것으로 오줌을 받아 마신 흔적이 있었다.
5월14일 영조는 여승 가선과 환자 박필수, 평양 기생 5명을 세자를 타락시킨 죄로 처형했고, 홍봉한, 신만, 김성응 등의 청으로 세자의 스승인 윤숙, 임덕제를 유배했다. 윤숙과 임덕제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날에 울부짖으면서 홍봉한 등을 꾸짖어 거조를 잃었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모두 유배되었다. 그 후 선인문 앞에서 세자의 개인물건들을 태우라고 지시했는데 여기서 "유희하는 기괴한 물건" 등이 나와 영조가 분노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5월 15일 공식적으로 세자의 폐위를 공포했고 같은날 서필보, 정중유 등이 세자를 타락시킨 죄로 처형됐고, 이후로도 엄홍복, 조재호 등을 각각 처형 / 유배형에 처하고 궁노들을 민가에 폐단을 끼친 죄로 다스렸다.
결국 윤 5월 21일에 세자는 숨을 거두었고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자의 위호를 회복시켜 주었다. 다음은 사도세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영조가 한 말이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임오화변의 결과, 공석이 된 동궁()의 지위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이 계승하였다. 그러나 세손은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후사로서 종통()을 계승하였다.임오화변은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를 비상식적 방식으로 폐위한 사건이어서 당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새롭게 정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정조는 임오화변에 대한 재평가를 탕평 정치의 핵심 과제로 삼기도 하였다. 임오화변은 영조대 후반부터 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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