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혜빈양씨 -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후궁이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의 어머니이며, 손자뻘이 되는 단종의 유모였다. 본관은 청주이고, 시호는 문혜(文惠), 민정(愍貞)이다. 현감 양경과 부인 이씨 슬하의 외동딸로 태어나 처음에는 내명부 예하 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정1품의 빈에 오른 후 혜빈이라는 칭호를 하사 받았다. 자식으로는 세 아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두었다. 그녀가 영풍군을 키우고 있을 당시, 세자빈이 단종을 낳은 후 이튿날 갑자기 죽게 되자 세종은 문종에게 알려 경혜공주와 단종을 혜빈에게 맡기도록 했다. 혜빈은 기뻐하며 자청했고 단종과 경혜공주를 극진히 보살폈다. 특히 직접 기른 단종에게는 더욱 지극한 사랑을 주었으며 단종 또한 혜빈의 품에서 잠들기를 늘 원했다. 왕이 되어서도 단종은 혜빈의 처소에서 숙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수양이 모사를 염려하여 가로막았다.
지아비인 세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궐을 나가 산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 후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 2년여만에 죽고 12살의 단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산에 있던 혜빈이 다시 궁으로 들어오게 되어 단종을 보필하였다. 혜빈이 궁중을 장악할 것을 염려한 수양이 문종의 후궁인 홍 귀인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여 혜빈을 대신하게 하자 혜빈은 더 이상 단종을 보필 할 수 없었다. 혜빈은 이 일로 수양대군을 원망하였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단종이 선위하고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가산이 적몰된 뒤 청풍으로 유배를 갔다.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신하들의 여러 상소끝에 교수형으로 사망한다.
2. 강상인 - 조선전기 병조참판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정안군(靖安君: 태종)의 가신이었고, 태종의 즉위와 함께 사재(私財)의 출납을 감독하였다. 1402년(태종 2)강계지방에 파견되어 임팔랄실리(林八刺失里) 등의 여진을 위무하였고, 이후 태종대를 통하여 시위에 공헌하였다. 1418년 병조참판이 되었는데, 태종이 선위(禪位)하기는 하나 세종이 아직 나이가 어리다 하여 국가의 중대사와 병권만은 양여하지 않고 친히 관장하기로 한 방침에 따라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상왕(上王: 태종)의 병권행사를 위한 핵심인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의 의도와는 달리 군사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하고 상왕에게는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옥된 뒤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과 직첩을 몰수당하고 옹진진(甕津鎭)에 충군(充軍)되었다가 원종공신임이 참작되어 용서받았다. 그 뒤 다시 전일에 박습·심정(沈泟) 등과 함께 병권이 양분됨은 옳지 않다고 한 말로 인하여 하옥되었고, 태종 부자간의 정을 끊으려 하였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단주(端州) 관노로 충속되었다가 의금부의 장계에 따라 모반대역죄로 참수되었다.
3. 맹사성 -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4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공조(工曹)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다.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
3. 유현정 - 조선전기 병조판서, 찬성사,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여명(汝明), 호는 월정(月亭). 첨의중찬(僉議中贊) 유경(柳璥)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문화군(文化君) 유진(柳鎭)이다.
고려 말에 음보로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쳐 전라도안렴사·장령(掌令)·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집의·좌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394년(태조 3)에 상주목사로 발탁되었다. 이후 병조전서(兵曹典書)·완산부윤을 지내고, 1404년(태종 4)에 전라도관찰사·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1409년에 판한성부사를 거쳐 1410년에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예조판서·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평양부윤·대사헌·이조판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병조판서·찬성사 등 요직을 거친 뒤 1416년에는 좌의정이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대마도를 정벌할 때 삼군도통사에 임명되었고, 1424년에는 영돈녕부사 겸 판호조사(領敦寧府事兼判戶曹事)를 지낸 뒤 1426년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고, 이로부터 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관직생활을 순탄하게 지냈다. 성품은 과단성이 있고 검소, 근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이치를 따지고, 옳은 일을 주장할 때에는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세자위를 폐할 때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나, 먼저 현명한 이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사실에서 유정현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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