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0대 왕인 경종이 이복동생이자 당시 세제 신분이었던 영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은 이 사안은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조선을 50년 동안 뒤집고 흔들어댄 초대형 사건이었다.
이 독살설이 등장한 배경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 비롯된다. 원래 몸이 허약하던 경종은 1724년 8월 2일부터 건강이 위독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병상에 누워있다가 2주 정도가 지난 20일에 저녁식사로 게장과 생감을 식사로 먹었는데, 이 게장과 생감은 전통적으로 한의학계에서 매우 나쁘게 보는 음식이다. 결국 식사 직후부터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자 의관들은 경종이 한의학적으로 꺼리는 게장과 감을 먹은 사실을 알고 곽향정기산과 두시탕, 인삼차를 계속 처방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고, 24일 오전에 경종은 아예 의식불명 상태가 된다.
24일 의식불명인 경종을 두고 이에 의관 이공윤은 "삼다(蔘茶 : 인삼차)를 쓰면 안 된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할 것 같으면 설사는 금방 멎게 할 수 있다."라면서 경종에게 계지마황탕을 처방했지만 저녁에 상태가 더 심각해진다. 이에 영조와 도제조였던 우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신하들이 급히 경종을 찾아가고 영조는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라는 지시를 내린다. 난데없는 지시에 이공윤은 처음엔 반대했지만 영조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 이에 인삼차를 2번 복용한다. 그러자 경종의 안시(眼視)가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온기를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되자 다들 안도했으나 얼마 뒤 경종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고, 이때 영조와 이광좌는 종묘에서 기도를 올리려 하는데 그 기도가 시작하기도 전에 경종이 결국 사망한다.
여기에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 궁합을 이용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음식이 감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 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사실 이건 야사 수준이 아니라 당대에 흔히 떠돌던 소문으로 보인다. 영조 31년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괘서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실록에서는 물론 명문으로 영조가 게장을 올렸다고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후 맥락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영조 31년 10월 9일, 영조는 신치운을 처벌하면서 하교를 내려 자신이 경종에게 게장이 진상된 것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나 애초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신치운이 게장을 먹지 않았다고 얘기했을 때 바로 의미를 알아듣고 분노한 것을 보면 이미 그 이전부터 게장 독살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는데 신치운에게 처음 들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시 경종의 병세는 그야말로 초미의 관심사였고 특히 영조에게는 더 그랬을 것이다. 수랏간에서 멋대로 진어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왕의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 어의들이 식사가 무엇이 올라가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을까? 어의의 사전검열을 통과한 것 부터가 매우 수상한 것이며, 여기에 의원들이 태클을 건 것을 당시 조정, 그리고 올라가는 약재 하나하나까지 따져보던 영조가 몰랐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30년이 넘게 지난 후 '나는 몰랐다' 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당시 경종은, 병세가 워낙 심각해서 그런지 자리에 드러누웠을 때 수랏상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영조가 지휘해서 게장과 생감을 올리고 ,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그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 사실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독살설은 확실히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긴 하다. 경종 독살건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 심지어 울다 지쳐서 나가떨어져서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는 말을 못한바람에 소론 준론들의 소위 참람한 언사가 실록에 기록되었다.
영조는 이 독살 사건에 대해 억울한것이 많았는지 영조 31년(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에서 "그 생감과 간장게장 내가 형님께 올린거 아니라고 이놈들아!"라는 글까지 쓴다. 그러나 당시는 임금의 주장에 쉽게 반박, 반론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였다. 몇 가지 덧붙이자면 당시에도 감과 게장이 궁합이 최악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있었고, 영조가 읽었던 책들 중에서 의학 서적이 있었는데 그 의학 서적에도 감과 게장의 관계는 아주 잘 나와있다.
죽기 직전에도 독살 시도가 있었다고도 한다. 경종은 말엽에 병으로 기운을 잃고 식사를 잘 하지 못했는데 게장과 생감을 올리자 웬일로 입맛이 돈다며 잘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게 되고 그 후부터 다시 건강 상태가 악화된다.
그러나 독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왜냐면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소화불량이 일어나서, 당시에도 나쁜 음식 궁합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고 무엇보다 게장과 감은 영조가 올린 음식이 아니라 사옹원에서 올린 음식이다. 그리고 영조가 올렸던 인삼차와 어의가 처방한 약이 상극이기는 했지만, 어의가 실력있는 인물이 못 되었다. 툭하면 이 약 처방하다가 다른 약 처방하는 어의를 어느 누가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영조 역시 어느 정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전문가도 아니면서 어의가 내린 처방을 무시하고 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한 점이다. 심지어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기운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경종은 사망하였다. 그렇지만 독살설을 제기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더군다나 영조의 정치적 입장에서도 경종이 죽어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기반 세력이 탄탄하다면 모를까, 소론이 득세하는 와중에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준 경종을 스스로 죽이면서까지 왕이 될 이유는 없으니까. 게다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와중에 어의가 한 처방을 뒤집으면서까지 인삼차를 처방한 것은, 그만큼 영조가 경종의 죽음를 바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경종은 이미 가망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지라, 상식적으로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사람을 일부러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독살할 정도로 영조가 어리석지는 않았다. 영조가 처방한 약을 먹고서도 임금이 끝내 절명했다면 영조에 의한 독살설이라는 낭설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도 영조는 이 음모론 때문에 평생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 굳이 독살을 하고 싶었다면 병세의 차도를 보고 회복될 기미가 보일 때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맞는 판단이다.
자신을 옹호해줄 세력이 미미한 상황이라면 자칫 이를 빌미로 쿠데타같은 반정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걸 알면서도 굳이 인삼차를 권한 것은 그만큼 경종이 살아나길 원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조 입장에서는 독살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저지르면서까지 적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왕 노릇을 할 바에야 경종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기반을 제대로 만들고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영조 개인의 입장에서도 더욱 편했던 것이다.
* 경종 사망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 임금의 병이 위급해지다
- 군정과 병영의 업무를 하지 않은 황해도 병마 절도사 이기복을 개차하다
- 밤에 한열이 갑자기 심해지다
- 창경궁 환취정으로 옮기다
- 교외에 나가 있는 김일경을 재촉하여 올라오게 하다
- 한열증이 그치지 않다
- 권변·이명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위솔 홍유도를 태거하고 사옹원 주부 박필선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금부도사 윤득귀를 도태시키고 호조 정랑 이제상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한성흠·유필원을 전라 우수사·광주 부윤으로 삼다
- 여러 도에 급재를 더 주게 하고 윤순을 사국 당상으로 임명하다
- 장령 윤동수를 조롱한 감사 권익관을 추고하게 하다
- 유명응·김시혁을 승지·수원 부사로 삼다
- 충청 감사 권익관을 추고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는 교리 오수원 등의 상소
- 병이 중하여 침선이 날로 감소되고 소변도 적어지다
- 조상경을 정언으로 삼다
- 약방에서 육군자탕을 올리다
- 밤에 가슴과 배가 아파오다
- 약방에서 두시탕 및 곽향정기산을 진어할 것을 청하다
- 복통과 설사가 심해지다
- 설사 증후가 그치지 않다
- 의식을 잃자 인삼차를 올리다
- 환취정에서 승하하다
<영조실록>의 기록
전라 감사 조운규(趙雲逵)가 나주의 객사(客舍)에 흉서(凶書)가 걸린 변고를 치달(馳達)하니, 임금이 좌포장(左捕將)·우포장(右捕將) 및 본도 감사에게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기찰하고 체포하도록 하였다. 당시 신축년 ·임인년 때의 여당(餘黨)과 무신년 때의 유얼(遺孼)로 번성한 무리가 있어 나라를 원망함이 날마다 심각하고 근거없는 말이 날마다 일어나므로 식견이 있는 자가 걱정을 하였었지만 상하(上下)가 편안하게 여기고 걱정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흉서를 걸어 둔 변고가 있었다. 글의 내용 가운데 간신(奸臣)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임금이 좌의정 김상로(金尙魯), 우참찬 홍봉한(洪鳳漢), 형조 참판 이성중(李成中) 등을 불러 장달(狀達)한 것을 보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황건적(黃巾賊)의 유인데, 틀림없이 무신년 때의 여얼(餘孼)이다. 그러나 무신년에 최규서(崔圭瑞)가 고변(告變)하였을 적에도 나는 오히려 동요되지 않았으며, 오광운(吳光運)·홍경보(洪景輔)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마음이 동요되겠습니까? 이는 오로지 인심을 동요시켜 동정(動靜)을 관찰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흉서의 자획(字畫)이 찍어낸 것과 같은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자, 승지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본래 쓴 필적을 감추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니,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 구선행(具善行)·우변 포도 대장(右邊捕盜大將) 이장오(李章吾)를 입시하도록 명하고, 흉서의 자획을 보이며 기한을 정하여 염탐해서 체포하도록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0책 83권 8장 B면
- 【국편영인본】 43책 557면
- 【분류】 사법(司法) / 정론(政論) / 변란(變亂)
금부 도사를 나주로 내려 보내어 윤지(尹志) 등 제적(諸賊)을 체포하게 하였다. 윤지는 역적 윤취상(尹就商)의 아들이다. 나주에 귀양을 가서 있으면서 몰래 역모를 품고 조정을 원망하며 같은 무리들과 체결하여 흉서(凶書)를 펼쳐서 걸었으므로, 전라 감사 조운규(趙雲逵)가 그 정황을 알아내어 조정에다 치주(馳奏)하니, 임금이 즉시 발포(發捕)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0책 83권 12장 A면
- 【국편영인본】 43책 559면
- 【분류】 사법(司法) / 정론(政論) / 변란(變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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