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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21대왕 영조 - 이금

by 무님 202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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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조선 21대 왕 영조(, 1694~1776)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 왕위를 지켰던 그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그 자신 콤플렉스와 개인사적 불행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했으며 이전의 그 어느 왕보다도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성군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영조

 

 

영조의 재위기간은 1724∼1776이며 이름은 이금(), 자는 광숙(), 호는 양성헌()이다. 숙종의 세 아들(··)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의 딸 정성왕후()이고,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이다.

 

조선의 제21대 국왕.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시는 몸종이자 궁녀의 옷을 빨던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였다. 이로 인해 숙종 말년 왕위계승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이복형인 왕세자(후일의 경종)를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측은 앞서 숙종 말년에 좌의정 이이명()의 독대에서 논의된 대로, 연잉군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착수하였다.

정언 이정소()의 세제책봉상소를 계기로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영중추부사 이이명()·판중추부사 조태채() 등 이른바 노론4대신의 요구와,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왕실의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숙종의 제2계비인 )의 삼종혈맥()논리의 지원을 받아, 연잉군이라는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삼종혈맥이란 효종·현종·숙종에 걸치는 3대의 혈통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숙종의 유교()라고 하는데, 여기에 따르면, 임금인 경종 외에는 연잉군밖에 없는 셈이 된다

유봉휘()로 대표되는 소론 일부의 반발과 다른 후사를 물색하던 경종비 어씨()의 불만이 없지는 않았으나, 왕세제로 책봉된 명분은 당당하였다. 그런데 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임금이 병환중이어서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휴양하도록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소론은 왕권을 침해하는 불충이라 해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결국 대리청정론은 취소되고 김일경 등 소론 내 강경론자의 공격으로 노론세력이 일시에 정계에서 축출되어 소론정권이 들어섰다.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또 그들에 의해 왕세제의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에 고립된 상태를 면할 수 없었다. 뒤이어 노론이 경종에게 반역행위를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이른바 임인삼수옥()이 발생하여, 노론 4대신을 위시한 170여명의 노론계 신하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연잉군 역시 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처제인 서덕수()나 인척관계에 있는 백망()·정인중() 등이 고문 때문인지는 모르나 역모를 자백해 처형되고, 자신까지 피의자의 공초에 오르내리게 되어 역모에 관련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환관 박상검()·문유도() 등의 방해로 대궐출입이 막히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이에 왕세제 자리의 사퇴를 걸고 이를 문제화 해, 결국 집권소론으로 하여금 적대행위를 일삼는 환관·궁녀들을 처형하도록 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이후 보좌하는 동궁요속()이던 김동필()·조현명()·송인명()·박문수() 등과 대비 및 경종의 보호로, 불안한 속에서도 세제의 자리를 지켜 1724년경종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왕이 된 영조

왕이 된 영조가 가장 먼저 회를 치기 시작한 것은 소론, 그중에서도 자신을 죽이려 든 소론의 강경파였다. 갖은 핑계로 김일경과 삼수의 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한 영조는 삼수의 옥을 뒤집어 자신을 위해 죽은 노론들을 신원하고 여러 소론들을 내쫓고 노론 정권을 세운 다음에 과거는 잊자고 하였으나 4대신을 비롯한 거물들이 떼죽음 당해 이를 갈고 있던 노론 강경파 정호, 민진원 등은 협상은 없다고 선포하며 소론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차례 설득을 시도해도 말을 듣지 않자 영조는 정미환국으로 노론을 내쫓고 소론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런데 윤휴의 손자 사위인 남인 이인좌가 소론 강경파와 남인을 규합하여 초거대 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그나마 영조가 소론 탕평파 정권을 세워준 덕에 소론의 분노가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김일경, 목호룡의 처형에 잔뜩 올라 있던 강경파와 남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란은 서울, 삼남, 서북에서 동시다발로 치고 내려오는 초거 대규모였다.  다행히 서울과 서북의 반란은 조기 진압되었고 충청도의 이인좌는 소론 오명항의 진압군을 얕잡아보다가 화포 공격에 개박살났으며 전라도에선 태인 현감 박필현이 거병했으나 전라 감사 정사효가 배신하면서 와해된다. 경상도에선 정희량 등이 거창, 합천을 점령하고 기세등등했으나 안동 등지에선 근왕 의병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만만찮았고 결국 중앙군의 반격으로 진압된다.
이쯤되면 열받아서 소론과 남인을 다 죽일 만도 하지만 영조는 그러지 않고 소론 탕평파 정권을 놔두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 등을 기용하여 탕평을 지속했으니 영조의 업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자신이 의도했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정호()·민진원() 등의 노론당로자들이 을사처분과 환국에만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 소론에 대한 보복까지 요구하여 정국이 다시 노·소론 사이의 파쟁으로 흘러갔다. 1727년 갑자기 노론을 일시에 축출하고 이광좌를 수상으로 하는 소론정권을 형성(이를 이라 함)하면서 경종년간의 건저()·대리()를 역적의 행위로 규정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궤도에 오르는 것은 1728년의 무신란(, 혹은 )을 겪고 나서였다. 애초에 영조의 반대편에 섰던 소론은 영조가 왕세제로서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대체로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으나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과격파()들은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김일경이 처형되고 을사환국으로 노론정권이 들어서서 일반 소론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들이 숙종 20년의 갑술환국 때 노론에 의해 명의죄인()으로 몰려 정계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 일부(흔히 이라 함)를 규합해 무신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정미환국으로 집권하고 있던 이광좌·오명항() 등의 소론정권에 의해 조기에 진압되었으나 당쟁의 폐해로 변란까지 겪게 된 영조로서는, 붕당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란 명분 하에, 노·소론에게 교대로 정권을 맡기는 환국형태가 아닌 탕평정국을 위한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그것이 조문명()·조현명 형제와 송인명에 의해 주장된, 권력구성에 노·소론을 안배해 함께 참여시킴으로서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조제(調)형태의 탕평책이었다. 이를 구체화하는 방법이 분등설()과 양치양해()·쌍거호대()였다. 분등설은 노소론간의 충역시비를 양시쌍비()논리에 의해 절충하여 양측 모두가 벼슬길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이며, 양치양해 역시 어느 한쪽을 죄주려면 반드시 다른 한쪽에 짝을 구하여 함께 벌함으로써 편파성을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쌍거호대란 인사정책으로, 예컨대 노론 홍치중()으로 영의정을 삼으면 소론 이태좌()로 좌의정을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맡기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에 의해 노·소론간에 충역시비가 상반되는 경종년간의 신축·임인옥사(흔히 라 함)를 절충해 1729년의 이른바 기유처분()을 내렸다. 소론계의 조문명·조현명, 송인명·서명균() 등과 노론계의 홍치중·김재로·조도빈() 등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파를 주축으로, 노·소론간의 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정국이 실현되었으며 이 바탕 위에서 영조의 왕권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영조를 위하다가 역적으로 몰린 노론 피화자의 신원요구를 언제까지나 묵살하기는 곤란하였고, 무엇보다도 영조 자신까지 혐의를 받고 있는 임인삼수옥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유처분 이후 정권에 참여한 소론의 동의와 양보를 얻어 조금씩 노론 피화자를 신원시켜 갔다. 마침내 1740년(영조 16) 노론4대신에 대한 완전한 신원과 신임옥사가 소론 과격파에 의해 조작된 무옥()임을 판정하는 경신처분을 단행하고, 뒤이어 이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신유대훈()을 반포하였다.

이제 영조는 숙종-경종-영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노론은 물론 소론과 나라 전체 사람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종전의 노·소론 사이의 탕평에서 벗어나 노·소론은 물론 남·북인까지 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을 표방하고, 쌍거호대 대신 유재시용()의 인사정책을 취하여, 오광운()·채제공() 등의 남인과 남태제()·임개()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노론 명분 아래 추진되었으므로 흔히 노론 탕평이라 불리우는 이 시기의 탕평책 아래에서, 영조는 만년에 스스로 자신의 4대 사업으로 손꼽았던 이조낭관통청권()의 혁파, 한림회천법()의 회권법()으로의 전환, 균역법·산림()의 정치적 위상 격하(이상의 넷을 줄여서 ···이라 함)와 같은 개혁을 성사시켰다. 이 외에도 서원철폐나 노비신공의 반감, 군비와 군제의 정비 및 치세 후반기까지 계속되는 서적의 간행과 같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1755년(영조 31)의 을해옥사로 소론 내 과격파의 잔여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또 소론들 스스로 조태구·이광좌 등을 영조에 대한 불충이라 하여 죄안에 올리기를 청하며 자기들 당론의 잘못을 뉘우치는 소를 올림으로써, 노론 명분이 완전히 승리하였다. 이를 신임의리()라 하며, 향후 노론 집권의 기본명분이 된다. 또 이를 『천의소감()』이란 책자로 반포함으로써 한층 추진력을 갖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시기부터 집권세력 내부의 분열로 또 다른 시련을 맞게 된다. 그 분열이란 노론 내에서 1749년(영조 25)이래 대리청정을 해온 왕세자(후일의 사도세자)를 둘러싸고 표면화된 것이다. 세자가 신임의리에 투철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김상로()·홍계희() 등과 세자를 보호하려는 홍봉한 등의 외척사이의 갈등이었다. 곧, 동당()·남당·중당()의 명목으로 성립하였으며, 정성왕후가 승하하여 정순왕후가 계비가 됨에 따라 친정 아버지인 김한구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척신세력이 등장하여 이런 분열에 가세하고, 소론과 남인 일부가 이런 틈새를 이용해 정치력을 신장하려 꾀함으로써 전날의 노·소 대립처럼 살벌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노론 탕평은 이미 속으로 곪고 있었다.

1762년(영조 38) 영조가 자신의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참변()을 일으킨 것은 이런 갈등속에서였다. 신임의리의 붕괴를 우려하는 노론 일부의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서였건, 홍계희·김상로와 정순왕후 등의 궁중세력의 모함에 빠져서였건, 아니면 『한중록』의 서술처럼 이상 성격으로 인해 임금이 되기에 부적절한 인품이어서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간에 영조 개인으로서는 정치에서 또 한번의 고통과 좌절을 받게 된 셈이다.

더구나 나라의 근본()이라는 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한두 명의 동궁요속이 세자를 구원하려 했을 뿐, 어느 누구도 목숨을 내놓고 임금에게 충간해 신절()을 지킨 신하는 없었다.

이는 1689년(숙종 15)의 인현왕후 폐출 시 박태보·이세화의 죽음과 극히 대조적이다. 탕평이 사대부의 명절()을 무너뜨린다는 지적대로 영조에게 왕권의 안정은 가져다주었으나, 이제 군신관계는 이록(祿)을 매개로 할 뿐 전날의 사림정치에서 보는 의리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영조의 왕권은 점차 왕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외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임오화변 이후의 정국은 탕평이 여전히 표방되었지만 실은 홍봉한과 김한구를 각기 대표로 하는 두 갈래 척신세력의 노론·소론·남인·북인이 이해를 좇아 이합집산하는 형국을 보였다.

대체로 영조 말기의 정국은 왕세손을 등에 업은 홍봉한 세력이 우세하였으나, 외척에 비판적인 일부 관료가 청명당()을 형성하여 이를 견제하고 여기에 김한구계의 척신이 연결되었으며, 다시 왕세손(후일의 )을 보호하는 세력과 이를 모해하려는 세력간의 암투가 벌어지는 속에 고령으로 이미 노쇠해 버린 영조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나마 승하하기 몇 달 전 홍인한 등 권세가의 방해를 물리치고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성사시킴으로써 세손의 즉위를 순조롭게 한 것이 영조의 마지막 영단이었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또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1725년 영조는 압슬형()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으며,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형살()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1774년 사문()의 용형()도 엄금하였다. 그리고 남형()과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경제정책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서 1725년 각 도의 제언()을 수축, 한재에 대비하게 하였고, 1729년에는 궁전 및 둔전에도 정해진 분량을 초과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세하도록 하는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수하게 해 탈세방지에 힘썼다. 그리고 1760년에는 서울의 주민 15만명과 역부() 5만명을 동원해 2개월간에 걸쳐 개천(, 즉 오늘날의 청계천)을 준설하게 하고, 이어 준천사()를 설치, 이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서울시민의 골칫거리였던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하였다.

 

* 영조 재위기간 업적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이었다. 단순한 감필()이 아니라 모두 1필역()으로 부담을 균일하게 함으로써 양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그리고 감필로 인한 재정부족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결전()을 토지세에 덧붙여서 양반이 위주인 지주층의 부담을 끌어내고,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피역자에게 선무군관()이란 명칭을 부여하여 군관포를 징수하였다. 또한 어염세·은여결세 등 그 동안 국가세입에 들지 않던 세금을 국고로 환수하게 하여,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가 얽힌 양역문제 해결에서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까지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하였다. 이는 1750년 친히 홍화문()에 나가서 한성 시민을 만나서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는 의지를 보인 것과 함께 균역법이 갖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환곡분류법()을 엄수하게 하는 등 환곡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1763년에는 통신사(使)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한재시에 기민을 위한 구황식량을 수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편, 신분에 따른 역()을 더욱 명백히 하고자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균역법의 시행은 물론,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하였다. 1730년에 양처() 소생은 모두 모역()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역(), 여자는 모역에 따르게 하여 양역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하였다. 서얼차대()로 인한 사회참여의 불균등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1772년 서자의 관리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통청법을 제정해 서얼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었다. 영조는 생전의 신념으로 이끌었던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서원·사우()의 사건() 또는 사향()을 금지시키면서, 1741년에는 이를 어긴 170여 개소의 서원·사우에 대한 훼철을 강행함으로써 서원남설에 철퇴를 가하였다. 숙종 때까지 매년 10여 개씩 늘던 남설의 경향이 일시에 그친 것은 그 과단성 있는 정책의 집행이 가져온 큰 효과였다. 또, 1772년에는 과거시험도 탕평과()를 처음 시행하는 특례를 보였고, 같은 해에는 동색금혼패()를 집집의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군비와 관련해서는 즉위한 이듬해에 주전()을 중지시키고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며, 1729년에는 숙종 때 김만기()가 만든 화차()를 고치게 하고, 이듬해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만들게 하여 군기()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또 1755년 조선 전기 이래 임금의 친위군으로 존속해오던 금군()을 정비해 용호영()으로 독립시켰으며,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서 만들도록 해, 임진왜란 때 떨쳤던 해군력을 계승, 더욱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북방 변방 및 요새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여 1727년 북관군병()에게 총을 복습하게 하였고,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게 하며,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영조의 학문적 업적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감란록()』을 반사()하고, 이듬해『숙묘보감()』을 편찬하게 했고,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세계인 『퇴도언행록(退)』을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다.

또 1736년에는 조선왕조의 근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수명()시킴과 동시에 여성을 위한 『여사서()』를 언역()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1742년에 『천문도()』·『오층륜도()』를 모성()시켰으며, 이듬해에는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하였고, 1754년『소학훈의()』·『속오례의()』를 편찬하게 하며, 『경국대전』을 수명한 뒤 새로이 제도적으로 바뀐 것을 반영해 『속대전』을 만들었다.

1747년 『황단의궤()』를 편찬한 뒤 이듬해에는 백성들을 다스릴 때 법을 선용하라는 취지로 만든 관리들의 필독서 『무원록()』을 필삭, 훈석을 가하게 하여 각 도에 반포하였다. 1749년『속병장도설()』, 1753년『누주통의()』를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영조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천명하는 『천의소감()』을 이룩하여, 이를 내외에 반포하였고 1747년에는 『삼국기지도()』·『팔도분도첩()』·『계주윤음()』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1765년 『해동악장()』을 만들고, 『여지도서(輿)』를 인간()하게 하였으며 각 도의 읍지도 모으게 하였다. 한편, 177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또한, 영조는 스스로 여러 권의 책을 친제()하기도 하였다. 악서()의 전범()인 『악학궤범』의 서문과 스스로를 되돌아 본 『어제자성편()』을 지었다. 그리고 1754년에는 무신들을 위해 『위장필람()』을 저술, 이를 무신들에게 인반()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어제경세문답()』·『어제경세편()』·『백행원()』·『어제소학지남()』·『팔순유곤록()』·『어제조손동보()』·『어제효제권유문()』 등이 있다.

이 당시 재야에서 실학()이 확대되면서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간행하도록 했는데, 1765년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간행되었다. 또한 신경준()의 『도로고()』도 1770년에 편찬되었다. 영조는 친히 호학하였기 때문에 신학풍에 대한 이해도 깊었을 뿐만 아니라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함에서 오는 심적 갈등이 심한데다가 이복형인 경종의 독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와, 심지어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마침내는 왕으로서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무신란까지 겪었다.

이런 환경 탓인지는 모르나 영조는 때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는 성격장애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자녀에 따라 극단적인 애증을 나타낸 것이 이를 말하며, 이것이 결국 사도세자의 울화병을 유발하고 부자간의 갈등을 초래했다고도 말해진다.

조정의 인사문제에서도 자신의 감정기복에 따라 사소한 실언을 문제삼았다. 심지어는 삼상()을 일시에 파직시켰다가 다음날 바로 복직시키는 경우가 흔하였고,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런 인간적 결점이 몇 가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역경을 딛고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으며, 탕평에 의한 정국안정을 바탕으로 치세의 시기부터 현저해지는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문제의 해소를 통해 민심을 추스르며,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영주()였다.

 

 

1776년 83세로 승하하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다. 처음에 올린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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