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은 조성완조 제21대 왕인 영조의 재위기간인 1724년에서 1776년인 5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로서,모두 1백 27권으로 간행되었다. 고조 26년인 1889년에 묘호를 영조로 추존 개정한 뒤에는 <영조실록>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다른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영조실록>은 영조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778년 정조2년인 2월에 영조실록청이 설치되었고 편찬이 시작되었다. 그 뒤 3년 6개월만인 1781년 7월에 완성 간행되어, 사고에 봉안되었다. 편찬에 참여한 전후 실록청 총재관과 도청당상은 다음과 같다.
총재관 - 김상철, 서명선, 이은, 이휘지, 정존겸 도청당상 - 이쉬지. 서명웅, 황경원, 이복원, 채제공, 조준, 김종수, 유언호, 이성원, 이명식, 이연상, 정일상, 김익, 김노진, 김이소, 서유령, 윤이동 등이다.
영조는 1736년 83세에 세상을 떠났으면 존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회제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이고, 처음에 올린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1889년인 고종 26에 여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경내에 있다.
<영조실록>의 내용
영조의 휘는 금, 자는 광숙으로 숙조의 둘쩨 아들이며 생모는 숙빈 최씨이다. 6세에 연잉군으로 책봉되고, 경종 1년인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가, 4년인 1724년 8월 25일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으로 즉위하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직후 소론인 이광좌, 조태억을 영의정. 좌의정으로 삼고, 세제 책봉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였고, 신임옥사 때 자신을 모해한 김일정과 노론 역모설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하였다.
1727년 영조는 갑자기 노론을 축출하고 이광좌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정권을 구성하였다. 이를 정미환국이라 한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난)을 겪고 나서였다. 1757년 영종 33년 2월 정성왕후가 죽고 1759년 정순왕후가 계비로 들어오자 그녀의 아버지 김한구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척신세력이 등장하여 분열이 가속화되었고, 소론과 남인은 이런 틈새를 이용하여 독자세력화를 시도하였다. 1762년 영조 38년 영조가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참변이 일어났다. 영조는 1729년 사형수에 대해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였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1729년에는 오가작통 및 이정법을 엄수하게 하여 탈세방지에 힘썼다. 1760년 개천(청개천)을 준설하고 준천사를 설치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게 하였으며 영조 재위기간에 시행 된 경제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균역법이다.
1729년에 <감란록>을,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하였고, 1732년에는 이황의 <최도언행록> 등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 태실이야기
21대 임금 영조 태실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산 6-1 번지에 옛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이곳은 영조 (1724~1776년)의 태를 봉안한 태실이 있던 곳이다. 영조 태실은 충남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해서 영조 5년(1729년)에 만들었다. 태실의 형태는 중앙에 2단으로 된 정사각형의 대리석 위에 계란 모양의 태실석과 팔각의 처마돌을 놓았다. 주위에 8개의 장대석을 놓고, 팔각의 모서리에는 우주석을 세웠다.
규모는 1곽 10평으로 중앙에 2단으로 된 정방형의 대리석 위에 계란 모양의 태실석과 팔각의 갓처마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주위에 8개의 장대석을 놓고, 팔각의 모서리에는 우주석을 세웠다.
태실 앞에는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 상단에 조각한 태실비를 세웠다. 비신 앞면에는 '주상전하태실'이라 쓰여 있다. 뒷면에는 '옹정 7년 10월 14일'이라 쓰여있다. 이 영조 태실은 조선조 말기까지 나라에서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어태가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지자 크게 파손됐다. 이후 태실 자리에 민묘가 들어섰고, 태실비는 동민들이 마을로 옮겨 세웠다.
외항아리와 내항아리의 형태는 숙종의 태항아리와 비슷하지만, 뚜껑의 형태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제작 시기는 1695년이다.
1982년 청원군에서 갓처마돌이 없는 상태로 복원했다. 청원군에서 소장하고 있는 '태실가봉의궤'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70호로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비의 명문을 보면,
'아지비'는 <前面 : 康熙三十三年九月十三日寅時生王子阿只氏胎室, 後面 : 康熙三十四年五月二十八日立>
(전면 : 강희삼십삼년구월십삼일인시생왕자아기씨태실, 후면 : 강희삼십사년오월이십팔일립)
'가봉비'는 <前面 : 主上殿下胎室, 後面 : 雍正七年十月十四日建>
(전면 : 주상전하태실, 후면 : 옹정칠년십월십사일건)
으로 아지태실의 조성은 숙종 21년(1695년)에 있었고, 태실의 가봉은 영조 5년 (1729년)에 이루어졌다.
본문 발췌 : 조선의 세계적인 문화유산 태실 (저자 김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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