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실록>은 조선왕조 제20대 왕인 경종의 재위기간인 1720년에서 1724년인 4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실록>이며, 모두 15권 7책으로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 되었다. <경종실록>은 영조 2년인 1726년투너 편찬하기 시작하여 8녀인 1732년 2월에 완간하였다. 불과 7책의 작은 실록임에도 6년간의 긴 세월이 걸린 것은 당시 노론. 소론 간의 대립이 심하여 1727년 영조 4년의 정미환국 등 몇 차례의 정국 변동이 있었고, 신임옥사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종실록>은 좌의정 이집, 우의정 조문명이 총재관이 되고, 대제학 이덕수, 부제학 서명균 등이 도청 당상이 되어 편찬을 주관하였다. <경종실록>은 영조 초에 편찬된 <경종실록>을 정조 때 수정하여 편찬한 실록이다. 모두 5권 3책으로 원 실록의1/3 분량에 해당한다. 1778년 정조2년에 편찬이 시작되어 1781년 7월에 완성 간행 되었다. 그 이유는 여조 2년에 시작하여 8년에 완성된 <경종실록>은 소론인 이집, 조문명, 이덕수, 서명균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하였기 때문에 노론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경종은 1724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 존호는 덕문익무순인선효, 묘호는 경종, 능호는 의릉으로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경종실록>의 내용
경종은 숙종의 큰아들로서 휘는 이균,자는 휘서이다. 생모는 희빈 장씨이다. 숙종 46년인 1720년 6월 13일에 즉위하여 4년여 동안 재위하다가 4년인 1724년 8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경종실록>에 수록된 신임옥사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경종 즉위년인 1720년 7월에 조중우가 상소하여 경종의 생모인 장 희빈의 명호를 높일 것을 건의 하였으나 노론에 의해 죽었다. 경종 1년인 1721년 8월에 정인 이정소가 상소하여 후계자를 세울 것을 주청하자 노론의 위세에 눌려 아우인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다. 연잉군을 세제로 책정한 지 2개월 뒤인 이 해 10월에 노론은 다시 집의 노성복을 시켜세제에게 국정을 위임하자는 대리청정을 건의하였다. 좌참찬 최석항이 입궐하여 간절하게 만류하자 경종은 대리청정을 취소했다.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노론의 위신은 크게 손상되었다. 이에 소론 일파가 반격을 가하여 마침내 정국에 태풍을 이으키게 되었다. 이때 노론의 힘으로 세제가 되었던 영조의 쥐이도 매우 위태로웠으나 경종의 보호로 무사하게 되었다.
* 경종이 서거하던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5권, 경종 4년 8월
- 금부 도사 김수문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우림 장 채덕윤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이광보·심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임금의 병이 위급해지다
- 군정과 병영의 업무를 하지 않은 황해도 병마 절도사 이기복을 개차하다
- 밤에 한열이 갑자기 심해지다
- 창경궁 환취정으로 옮기다
- 교외에 나가 있는 김일경을 재촉하여 올라오게 하다
- 한열증이 그치지 않다
- 권변·이명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위솔 홍유도를 태거하고 사옹원 주부 박필선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금부도사 윤득귀를 도태시키고 호조 정랑 이제상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한성흠·유필원을 전라 우수사·광주 부윤으로 삼다
- 여러 도에 급재를 더 주게 하고 윤순을 사국 당상으로 임명하다
- 장령 윤동수를 조롱한 감사 권익관을 추고하게 하다
- 유명응·김시혁을 승지·수원 부사로 삼다
- 충청 감사 권익관을 추고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는 교리 오수원 등의 상소
- 병이 중하여 침선이 날로 감소되고 소변도 적어지다
- 조상경을 정언으로 삼다
- 약방에서 육군자탕을 올리다
- 밤에 가슴과 배가 아파오다
- 약방에서 두시탕 및 곽향정기산을 진어할 것을 청하다
- 복통과 설사가 심해지다
- 설사 증후가 그치지 않다
- 의식을 잃자 인삼차를 올리다
- 환취정에서 승하하다
- 우의정 이광좌를 원상으로 삼아 직숙하게 하다
- 사각에 목욕을 하다
- 예조에서 성복하는 날 사위하는 절목을 올리다
- 미각에 소렴하고 재궁이 작아 부판을 사용하게 하다
- 생기의 기록을 잘못 올린 승지를 추고하게 하다
- 태백성이 나타나다
- 예조에서 백관의 상복 제도를 수정하여 올리다
- 의정부에서 사위의 절목을 올려 권하나 듣지 않다
- 영의정 최규서가 용인에서 달려오다
- 태백성이 나타나다
- 세제가 왕위에 오르라는 의정부의 계달을 따르다
- 천둥하고 우박이 내리다
- 왕대비의 회복을 경사하는 시험을 졸곡 뒤로 물리어 시행하게 하다
- 사직 이인복이 왕대비 복제 의주를 개정할 것을 청하다
- 대렴하여 시신을 재궁에 내리다
- 선정전에서 성복하다
- 왕세제가 인정문에 나아가 즉위하다
이전 경종 4년 7월
- 좌승지 박내정 등이 천재 지변으로 김성 궁인에 대한 삼사의 계청을 윤허할 것 등을 청하다
- 더위로 태묘 전알의 날짜를 물려서 거행하게 하다
- 무과에서 간계를 쓰다 붙잡힌 자를 속전하게 한 형조 당상을 추고하게 하다
다음 경종 4년 9월
* 경종의 태실이야기
20대 임금 경종의 태실은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산34-1에 위치해 있다.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6호다.
경종의 태실은 숙종의 왕자로 탄생한 이듬해인 숙종 15년(1689년)에 이곳에 안치되었다. 경종이 일찍 죽자, 영조는 선왕의 태실을 웅장하게 꾸미고 태실비를 세워 수호 군사 16명이 지키게 했다. 3년마다 안위제도 지냈다. 비석의 명문을 살펴보면, 아기태실의 조성은 숙종 15년(1689년)에 이루어지고, 태실의 가봉은 영조 2년(1726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태실은 순조 31년(1831년) 도굴 당했다. 이 후 조선총독부는 태실의 관리와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1929년 조선왕조의 태실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겼으니, 경종 태실도 이때 태항아리를 꺼내가 석물은 흩어지고 태실비만 남았다. 1976년에 충주시에서 태실을 복원했다. 태봉 정상에는 완전한 형태의 태실과 아기태실비, 가봉태실비가 각각 1기씩 잘 정비되어 보존되고 있다. 태실은 보주형연엽개첨석, 중동석, 방형대석, 난간석, 팔각첨석 등을 갖추고 있다.
태실의 형태는 석조로 8각의 형태를 만들어 돌 난간을 두르고, 그 가운데 4각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8각의 상대석을 얹었다. 별다른 장식은 없으며, 구형의 태실이 있다. 8각의 옥개석 낙수면에는 합각 머리를 뚜렷이 나타냈다. 정상에 보주만 조각한 8각 원당형의 부도식 태실이다. 태실 앞에는 강희 28년(1689년)에 세원 원자아기씨 태실비와 옹정 4년(1726년)에 세운 경종대왕 태실비가 서 있다.
비석의 명문을 살펴보면,
'아지비'는 (前面 : 康熙二十七年十月二十八日酉時生元子阿只氏胎室, 後面 : 康熙二十八年二月二十日立)
(전면 : 강희이십칠년십월이십팔일유시생원자아기씨태실, 후면, 강희이십팔년이월이십일립)
'가봉비'는 (前面 : 景宗大王胎室, 後面 : 雍正四年九月初八日建)
(전면 : 경종대왕태실, 후면 : 옹정사년구월초팔일건)
으로 아지태실의 조성은 숙종 15년(1689년)에 이루어지고, 태실의 가봉은 영조 2년(1726년)에 있었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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