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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숙종 20년 갑술환국

by 무님 2020.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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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은 1694년(숙종 20)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이다. 

 

* 조선왕조실록 그날의 기록

 

 

 

발단은 음력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서인 노소론이 함께 민심을 불안케 하는 풍문을 퍼뜨리고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서인 함이완의 밀고를 받으면서 일어났다. 숙종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에서 엄히 조사하고, 특별히 엄중한 형벌을 쓰라고 명하였다.
3월 25일 우윤 겸 포도대장이자 중전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가 소론과 왕래한 것을 사죄했으나 숙종은 되려 위로 했으며 뇌물 수수 혐의도 다음날 국문에서 부정되었다. 그리고 노론의 김춘택과 지방의 거부 출신 무인 이시도, 소론의 한중혁 부자 등이 줄줄이 끌려왔다. 이 과정에서 이시도가 “한중혁 부자가 남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남인의 삼대장들이 종실 의원군을 왕으로 세우려했다는 무고를 하려고 했다.”라고 증언했으며, 이 과정에서 또 동평군이 엮였다. 심지어 효종의 딸이자 숙종의 고모들인 숙안공주·숙명공주·숙휘공주에 숙종의 여동생인 명안 공주의 유가족까지 얽혀들어갔다. 여기까지는 그야말로 서인 전원의 사망 플래그. 민암을 위시한 남인들은 세 공주 등도 엄히 다스려야한다고 상소했다.
그러나 3월 29일 유생 서인 노론 김인이 탁남 민암과 장희재가 역모를 꾀한다고 역고변을 한다. 숙종은 처음에는 고변이 허황되다며 믿지 않는 모양을 보이며 민암과 장희재를 위로했으나 4월 1일 국문에서 갑자기 모든 것이 뒤집힌다

 

1694년에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실권을 쥐고 있던 남인계의 민암()·이의징() 등이 민씨복위 운동의 주동자들을 심문, 그 사실을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폐비 사건을 차츰 후회하게 된 숙종은 오히려 기사환국 당시 국문을 주관한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 등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훈련청과 어영청의 양대장에 신여철()·윤지완() 등 소론계를 등용, 정국을 일변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환국 도모는 대체로 두 방향에서 추구되었다. 하나는 한중혁의 소론 쪽이 집권 남인측의 막후실력자인 총융사이자, 왕비 장씨의 친동생인 장희재()와 동평군 항()에게 뇌물을 쓸 것을 계획한 것이다.

그것은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되 별궁에 거처하도록 하게 한다.’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남인계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세력을 잃은 노론과 소론의 진출을 어느 정도 만회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남인과 왕비 장씨에 대한 숙종의 편향심을 돌리게 하여 남인의 나쁜 점을 자세히 알리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기사환국 이후 새로이 왕의 사랑을 받게 된 숙빈 최씨( : 영조의 어머니)와 연결을 가져, 숙종에게 남인계의 잘못된 점을 자세히 알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숙종은 민암 등 남인의 보고를 받기 전에 태도를 돌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남인을 물리치고 남구만()을 영의정, 박세채()를 좌의정, 윤지완을 우의정에 각각 기용, 소론 정권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노론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된 것을 비롯, 송시열()·민정중()·김익훈()·김수흥()·조사석()·김수항() 등이 복관되는 등 기사환국 이전의 상태가 되었다.

반면, 남인측은 민암·이의징이 사사되고, 권대운()·목내선()·김덕원()·민종도()·이현일()·장희재 등 다수가 유배되었다. 그리고 왕비 장씨마저도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력을 잃은 남인계는 그 뒤 이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 희빈 장씨의 사약을 받던 그날의 기록  <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35권, 숙종 2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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