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환국은 1680년(숙종 6)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을 말한다.
숙종은 아버지인 현종이 예송논쟁에 휩싸여 신권에 끌려다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14살에 등극하자마자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나 증조할머니 장렬왕후 조씨의 수렴청정 없이 곧바로 친정을 하였다.
아래 꾸준히 언급되는 삼복(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남인과 가깝게 지냈으며, 복선군은 현종 경신대기근 시기 청나라에 가서 강희제에게 대량의 구휼품을 얻어왔다. 군약신강이란 표현이 나온 바로 그 사행이다. 이 사행은 서인인 현종비 명성왕후와 명성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우명, 김좌명 등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북벌론을 강경하게 주장했던 윤휴 등은 "청나라가 삼번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를 틈타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무과를 실시해 무려 18,000명을 선발, 대흥산성에 모아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것이 안 그래도 앞선 갑인예송에서 대판 깨지고 절치부심하고 있던 서인들의 남인 공격 빌미가 된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남인은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영향으로 모후의 족질 김석주(金錫胄)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할아버지 잠(潛)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油幄:왕실 사용의 기름칠한 천막)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柳赫然)에서 서인계의 김만기(金萬基)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申汝哲), 수어사에는 김익훈(金益勳) 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보직을 그대로 고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을 멀리하는 숙종의 태도가 확실하게 드러난 뒤,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있게 되었다. 즉, 허적의 서자 견(堅)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근자에는 그들에 의하여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의 피해가 남인계 여러 인사에게 미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도체찰사부는 효종 때까지 잦은 전란과 군비의 필요성으로 상설되었으나, 현종 때부터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숙종 초에 중국 쪽의 정성공(鄭成功)·오삼계(吳三桂) 등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윤휴(尹鑴)·허적 등의 주장이 제기되어, 1676년 정월에 다시 설치되었다.
허적은 훈련도감·어영청 등 서울의 군영도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귀일시키자고 건의하였으나, 김석주측의 반대로 다음해 6월에 일시 혁파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이 이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국왕 및 궁성 호위부대로 발족한 중앙군영들은 예외적인 존재로 그것에 통속되지 않았다. 이 때 총융사와 수어사는 중앙군영의 하나였으나, 경기도 군사력으로 간주되어 도체찰사부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남인측이 나머지 두 중앙군영의 군권마저 이에 귀일시키려 하자, 김석주 등의 반발을 받은 것이다.
도체찰사부는 1678년 12월 영의정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었으나, 숙종은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실상 중앙군영들은 대부분 서인측에 의하여 창설, 발전되어 온 것이어서, 이에 관한 서인의 관심이 높았다. 이 사건 벽두에 중앙군영의 군권이 서인계에 전격적으로 넘겨진 것이나, 김석주가 서인과 제휴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역 혐의의 주된 내용이 도체찰사부 군사의 동원문제로 귀착됨에 따라, 이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계된 자 모두가 연루되게 마련이어서 허견과 삼복(三福)뿐 아니라 허적·윤휴·유혁연·이원정(李元楨)·오정위(吳挺緯) 등 남인계의 중진들이 많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고변자 정원로 또한 원래의 공모자의 한 사람으로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왕족들과 역모 주동자로 지목된 허견을 비롯해 허적, 허목, 윤휴 등의 남인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했다.
나름대로 이론 싸움으로 예의를 갖추며 싸우던 예송논쟁과 달리 한 편이 완전히 갈려나가는 대대적인 숙청은 관료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왔고, 이에 상호공존의 붕당 정치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또한 서인의 분파도 가져왔는데, 남인 처벌에 있어 강경한 입장인 송시열의 노론과 비교적 온건한 입장인 윤증의 소론이 그것이다. 이는 곧이어 1681년 회니시비이라는 사문의 시비문제로 표면화 되었다. 숙종은 자신의 친위 세력을 한 곳으로 결집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외척, 더 정확하게는 더 만만한 처가이다. 숙종 시기에 여인천하가 열리는 것은 이 때문으로, 숙종은 보다 부담없이 갈아치울 수 있는 상대인 처가에 권력을 몰아주고, 그 처가와 손잡은 당파가 권력을 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인의 딸이라는 평이 도는 장희빈이 중전에 오른다거나, 숙종의 첫 정비 인경왕후가 죽은 다음에 국상 중인 상황에서 명성왕후가 반억지로 민유중의 딸(인현왕후)을 새 왕비로 택해 국혼을 진행시켜 버린다거나 하는 괴랄한 사건들이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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